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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없이 신장이식…'록의 여왕' 곁 지킨 16세 연하 남편 순애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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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터너. 83세로 사망했다. epa=연합뉴스

티나 터너. 83세로 사망했다. epa=연합뉴스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두 번째 남편 덕에 깨달았습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별세한 '록큰롤의 여왕' 티나 터너는 자서전 『행복이 당신이 된다(Happiness Becomes You)』에 이렇게 적었다. 터너에게 오랜 기간 결혼은 불행과 동의어였다. 동료 뮤지션이었던 아이크 터너와 듀오를 결성하며 스타덤에 올랐지만 개인적으론 불행의 시작이었다. 곡절 끝 만난 두번째 남편 어윈 바흐와는 2013년 결혼했는데, 바흐는 티나 터너보다 16살 연하인 음악 사업가다.  

그러나 첫 결혼이 없었다면 티나 터너도 없었을 수 있다. '아이크 & 티나 터너'는 그래미상 수상과 앨범 판매고 모두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명예와 상업적 성공을 거머쥐었다. 

문제는 8세 연상 남편의 폭력. 아이크 터너가 부인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봤다는 식의 증언은 차고 넘친다. 결국 티나 터너는 결혼 12년만인 78년 이혼했다. 아이크 터너는 당시 로큰롤계에서 영향력이 대단했다. 싱어송 라이터인 그가 없으면 티나 터너도 어려울 것이란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티나 터너는 보란듯 세간의 추측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할리우드 명예의전당의 티나 터너 표지석. 그의 부고가 전해진 24일 추모의 꽃이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할리우드 명예의전당의 티나 터너 표지석. 그의 부고가 전해진 24일 추모의 꽃이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아이크 &'이라는 수식어를 뺀 티나 터너는 솔로로 대성했다. 아이크 터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극단적 선택 또는 암 투병으로 사망하는 아픔도 겪었지만 음악은 꿋꿋이 계속했다. 그래미 상에 후보로 지명된 횟수만 25회, 실제 수상은 8회에 이르며, 앨범 판매고는 1억5000만 장에 달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그의 부고를 전하며 "남편의 학대에서 벗어난 티나 터너는 이혼 후에 더 멋진 솔로 커리어를 만들어냈다"며 "그의 40대와 50대는 젊은 시절보다 더 빛났다"고 전했다.

피플지에 따르면 티나 터너는 이혼 후 누군가와의 관계를 맺는 것을 꺼리고 음악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다 1988년 유럽 투어 중에 어윈 바흐를 만났다고 한다. 바흐는 당시 유력 음악 레이블이었던 EMI의 임원이었다. 터너는 자서전에 "투어 준비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어윈을 본 순간 뭔가 짜릿함이 통했다"며 "외모도 잘생긴데다 말도 잘통했다"고 적었다.

상호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그해 연애를 시작했지만 공개 연애를 한 것은 한참 뒤다. 터너는 "16살 어린 남자가 내 돈과 명예만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지긋지긋하다"며 "대체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밖에 하질 못하나"라고 적었다. 티나 터너는 또 "내가 더 잘 나가더라도 남편이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며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동시에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고 전했다.
결혼 경력이 전무했던 바흐는 티나 터너에게 진심이었다고 한다.

그는 HBO 다큐멘터리에서 "첫눈에 반했다"며 "연애를 하며 사실 청혼도 여러 번 했는데 매번 '예스'라는 답을 못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티나 터너가 신장 이상 및 암 진단을 받으며 상황은 바뀌었다. 바흐에게 신장 이식을 받으며 건강을 회복한 티나 터너는 결국 청혼을 받아들였고,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티나 터너와 두번째 남편 어윈 바흐. 2015년 당시 사진이다. 로이터=연합뉴스

티나 터너와 두번째 남편 어윈 바흐. 2015년 당시 사진이다. 로이터=연합뉴스

피플지에 따르면 둘은 결혼 서약 절차는 간소하게 고집했고 피로연을 성대하게 치렀다. 피로연엔 오프라 윈프리부터 온갖 팝스타 등이 초대됐으며 화려한 부대행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티나 터너는 이후 "결혼 서약은 일종의 상징 같은 것인데, 우리에겐 그런 상징으로 세간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티나 터너는 결혼 후 미국 국적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유럽으로 이주했다. 별세한 곳 역시 스위스 취리히 인근 남편과 함께 살던 자택이다.
아이크 터너는 2007년 홀로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해 12월 10일 자신의 조수에게 "크리스마스까지 못 버틸 거 같은데"라고 말한 이틀 뒤 숨을 거뒀다.

티나 터너는 특유의 강렬한 목소리와 무대 매너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은 그의 부고를 전하며 "티나 터너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없다"고 전했다. 티나 터너는 사망했지만 그의 음악은 남았다는 의미다. "자석 같은 매력을 가진 음악과 인생의 개척자"(미국 뉴욕타임스) "록큰롤의 전설"(영국 가디언) "아이콘이 사라졌다"(미국 CNBC) 등의 보도가 세계에서 쏟아지고 있다.

동료 뮤지션들도 애도의 목소리를 냈다. 믹 재거는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냈던 티나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며 "티나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글을 올렸고, 티나 터너와 '잇츠 온리 러브'라는 듀엣을 불렀던 브라이언 애덤스 역시 "너무도 슬픈 날"이라는 메시지를 냈다. 백악관 역시 "음악계의 큰 손실"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티나 터너. [중앙포토]

티나 터너.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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