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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인턴이 간다 | ‘하루 생활비 1만원 챌린지’…MZ세대 新자린고비 됐다

중앙일보

입력

“1000원짜리 생수? 수돗물 마셔라”

살인적 고물가에 절약 방법 공유하는 익명 모임 ‘거지방’ 유행
싼값에 양껏 먹을 수 있는 ‘한식 뷔페’도 대학생들이 자주 찾아

아침 일찍 학식을 받기 위해 학생 식당에 줄을 길게 선 고려대 학생들. / 사진:연합뉴스

아침 일찍 학식을 받기 위해 학생 식당에 줄을 길게 선 고려대 학생들. / 사진:연합뉴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5000원, 저녁은 마트 김밥 세트 행사로 3800원, 총합 8800원 썼습니다.”

직장인 박우영(30)씨는 ‘1만원 챌린지’를 벌써 두 달 넘게 실행 중이다. ‘1만원 챌린지’란 하루 생활비를 1만원 이하로 쓰는 것을 말한다. 극단적인 절약 캠페인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것은 가파른 물가 상승 탓에 주머니 사정이 더욱 궁해졌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 기자와 만난 박씨는 마트에서 샀다는 김밥 세트를 먹었다. 소고기 김밥 7조각, 참치김밥 7개로 이뤄진 김밥 세트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한 끼로 먹기엔 양이 부족해 보였다. 박씨에게 배고프지 않으냐고 묻자 “보통 11시에 자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어서 괜찮다”고 답했다.

박씨가 21세기판 자린고비가 된 것은 살인적인 고물가 때문이다. 박씨는 “나도 맛있는 음식을 사먹고 영화 관람 등 문화생활도 하고 싶다”면서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또래가 모인 익명 모임이 있기에 1만원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박씨가 가입한 모임은 일명 ‘거지방’으로 불리는 익명 카카오톡 단체방(오픈 채팅방)이다. 박씨는 앞선 지출 내용을 거지방 오픈 채팅방에 올렸다. 카톡에 올리자마자 ‘좋은 절약이다’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이후 다른 참가자들도 하루 지출을 정산하는 내역들을 경쟁하듯 올렸다. 박씨와 비슷하게 하루 1만원 이하 지출이 주를 이뤘다. 심지어 지출이 0원인 참가자도 있었다. 그는 교통비 없이 걸어다녔거나 끼니는 굶거나 얻어먹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박씨는 “(제가) 교통비를 포함해 생활비로 한 달에 30만원 정도 쓰는데, 이건 거지방에서는 평범한 축에 속한다”며 “한 달 생활비 18만원을 인증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한식 뷔페로 1일 1식’ 하기도

카카오톡 ‘거지방’의 실제 대화 내용. 거지방은 지출 내역 공유와 이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으로 젊은 세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 사진:이상우 인턴기자

카카오톡 ‘거지방’의 실제 대화 내용. 거지방은 지출 내역 공유와 이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으로 젊은 세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 사진:이상우 인턴기자

“생수 대신 아리수(서울 수돗물) 마시거나 퇴근 전 회사나 관공서에서 정수기 물 떠가세요.” 박우영 씨가 활동하고 있는 ‘거지방’에 기자가 ‘생수를 사려고 한다’고 글을 올리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돈 낭비’라며 공짜로 물 마시는 법을 알려줬다. 대학생부터 사회 초년생 등 젊은 세대가 다수인 ‘거지방’ 카카오톡 익명 단체방에서는 이처럼 갖가지 돈 절약 방법이 공유된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면 얼음을 씹어 먹어서 입안의 차가운 느낌으로 대리만족한다든지 지하철 기준으로 네 정거장 이하 거리는 따릉이(서울시 공유 자전거)를 타서 교통비를 아낀다는 식이다.

직장인들보다 주머니가 더 궁한 대학생들은 주로 학식(학교식당)을 이용해 식비를 절약한다. 5월 초, 고려대 학생회관 학생식당.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학생들이 배식구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생 김재현(26)씨는 “평일 아침밥은 항상 학식으로 해결하는데, 올해 들어 저 같은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 달) 용돈이 80만원인데, 자취 비용으로만 한 달에 40만원이 나가서 언제나 쪼들린다”며 “(1000원짜리 학식) 덕분에 식비 지출이 절반 넘게 줄었다”며 학기가 끝날 때까지 애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부터 시작된 ‘1000원 학식’은 고려대를 포함해 가톨릭대, 경희대, 서울대, 성균관대, 서울시립대, 인천대 등 총 41개 대학교가 사업을 진행 중인데, 저렴한 가격 때문에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싼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한식 뷔페도 대학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외국어대 인근에는 근래 한식 뷔페가 5개나 생겼다. 한식 뷔페에서는 점심 시간이 시작되는 낮 12시를 지나 오후 1시 이후까지 식사하는 대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한식 뷔페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45)씨는 “하루 평균 손님이 300명 정도 되는데, 그중 외대 학생들이 절반 가까이 이용하는 것 같다”며 “인기 있는 메뉴인 보쌈이나 제육볶음이 나오는 날에는 1시간도 안돼 음식이 동 난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하루 한끼로 버티는 대학생도 있었다. 한식 뷔페에서 식사를 하던 진승현(27)씨는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오늘 마지막 식사라고 했다. 일명 ‘점저(점심 겸 저녁식사)’로 한식 뷔페에서 최대한 많이 먹으면 밤까지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단다. 진씨는 이날 메뉴인 닭갈비를 가득 퍼담으면서 “7000원으로 두 끼를 해결하면 식비를 많이 아낄 수 있다”며 “이렇게라도 돈을 아껴야 부모님께 더 이상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 구매, 타임 세일 게시글 인기

최근 대학가를 중심으로 많이 생긴 한식 뷔페. 7000~8000원 가격에 마음껏 먹을 수 있어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 사진:이상우 인턴기자

최근 대학가를 중심으로 많이 생긴 한식 뷔페. 7000~8000원 가격에 마음껏 먹을 수 있어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 사진:이상우 인턴기자

“치킨 먹고 싶을 때는 상품권 중고 거래를 통해 10~20% 할인된 가격으로 사 먹어요.” 직장인 박채연(25)씨는 1주일에 두세 번 정도 상품권 중고 거래 앱을 사용한다. 박씨가 사용하는 중고 거래 앱에서는 음식뿐만 아니라 영화표, 백화점 상품권 등 다양한 산업 분야 상품권이 할인된 가격으로 거래된다. 앱 사용자들끼리 서로 쓰지 않는 상품권을 내놓아 싸게 팔기 때문이다. 상품권 시장의 당근마켓인 셈이다. 박씨는 앱에서 구매한 수십 장의 상품권들을 보여주며 “상품권 중고거래 앱을 사용한 뒤로 어림잡아 한 달 평균 10만원은 덜 쓰는 것 같다”고 했다. 박씨는 “물가가 폭등하면서 ‘이왕 사는 거 최대한 싸게 사자’란 인식이 전반적으로 퍼진 것 같다”며 “커뮤니티에서도 공동 구매라든지, 타임 세일 관련 글이 인기글로 자주 올라온다”고 말했다.

참가자만 1000명이 넘는 일명 ‘거지방’에서 활동 중인 대학생 전희산(21)씨는 매장에서는 옷만 입어보고, 구매는 온라인에서 하는 ‘쇼루밍족’이다. ‘쇼루밍’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상품을 꼼꼼히 보고, 구매는 온라인 매장에서 싸게 구매하는 것을 지칭한 다. 고생한 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옷을 구매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전씨는 “보통 온라인 매장가가 오프라인 가격보다 30%는 싸다”며 “방금 입어 보고(온라인에서) 구매한 바지는 2만원 싸게 샀다”고 흡족해했다.

이처럼 고물가 시대에 절약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특히 ‘거지방’은 단순히 돈을 아끼려는 모임을 넘어 서로 일상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친목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 젊은이는 “열심히 저축해서 1000만원 빚을 갚았다”며 고군분투한 사연을 올렸고, 미용실 가는 것도 사치라는 말이 올라오자 ‘영화 ‘아저씨’의 주인공 원빈처럼 스스로 반삭 하면 된다’라는 등 시시콜콜한 유머로 답했다.

경기 불황과 고물가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들의 이 같은 세태에 대해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거지방 열풍은 (경제적)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꿔보려는 젊은 세대들의 노력이 발현된 것이다”며“(익명 카카오톡 단체방 내에서) 글을 올리면 바로바로 답이 온다거나 ‘좋아요’ 등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가시적인 즉답성이 젊은 세대에겐 서로를 위로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상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shineto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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