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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바다의 오염, 정치의 오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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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2011년에도 과학과 우려는 달랐다
IAEA 방식을 테러, 독극물이라니
이런 정치 품격으로 G8 자격있나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1 2011년 3월 후쿠시마의 기억은 치열했다.

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과 최대 39m 높이의 쓰나미가 도호쿠(東北)를 덮친 11일 오후 2시46분, 나는 공교롭게도 출장차 도호쿠에 있었다.

전기·통신·수도가 모두 끊겼다. 강한 여진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경험하지 못한, 죽음 문턱까지 간 끔찍한 세상이었다.

도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인근 후쿠시마 1호기의 수소 폭발 소식을 들었다.

2011년 3월 14일 후쿠시마 제1원전의 3호기가 수소폭발을 일으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장면. 사진 후쿠시마중앙TV 캡처

2011년 3월 14일 후쿠시마 제1원전의 3호기가 수소폭발을 일으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장면. 사진 후쿠시마중앙TV 캡처

14일 3호기, 15일 2호기와 4호기가 폭발했다. 방사능 구름이 비를 뿌리며 도쿄를 덮쳤던 15일을 기억한다.

당시 원전 주변에선 요오드와 세슘 등 온갖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

3개월이 지나 미국 캘리포니아로 후쿠시마 잔해들이 흘러가자 "캘리포니아의 플루토늄이 증가했다"는 말이 돌았다.

또 "구로시오 해류를 타고 1~2년 뒤 한국에 방사능 바닷물이 유입될 것"이란 이야기가 확산했다.

그때는 나도 그렇게 믿었다. 사고 당일의 끔찍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방사능 오염수가 아무 정화 처리가 안 된 채 바다로 퍼져 나갔지만 광대한 태평양에서 완전히 희석됐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과 '내 머릿속 우려'는 달랐던 것이다.

지난 2월 도쿄전력 관계자들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외신기자들에게 오염수 저장탱크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도쿄전력 관계자들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외신기자들에게 오염수 저장탱크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일본은 물막이 공사를 하고 3억 달러를 들여 얼음장벽을 구축했다. 그러자 방사성 핵종이 64종에서 30여 종으로 줄었다.

농산물도 마찬가지다. "후쿠시마산 농산물을 먹으면 암에 걸린다"는 괴담이 한국에 횡행했다.

그런데 5년여에 걸쳐 후쿠시마산 쌀 1000만 포대를 전량 측정하니 99.99%가 kg당 25베크렐 미만(기준치는 100베크렐)이었다. 끈질기고 철저한 제염의 결과였다.

그래도 안 믿는 이들은 "일본이 거짓말 하고 있다"고 했다.

방사성 물질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라 "있느냐 없느냐"로 따지고, 상상에 가까운 가정을 잣대로 삼았다.

전문적 지식도, 끔찍한 기억도 없으면서 그랬다.

#2 후쿠시마 시찰단을 놓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안전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오염수 투기는 최악의 방사능 투기 테러"라며 "우리 또한 오염수 테러, 방사능 테러 공범이란 지적을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함께 쓰는 우물에 독극물을 퍼넣으면서 '이건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지난 20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인근 세종대로에서 열린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전국 행동의 날'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인근 세종대로에서 열린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전국 행동의 날'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국민의 안심에 대한 우려라면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게 안전성 자체를 부인하고 '테러' '독극물'로 몰아세우는 건 비이성적이다.

다핵종제거장치(ALPS)로 처리해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허용기준을 넘지 않도록 희석하고, 이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검증한 물이 어찌 방사능 테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를 인정한 미국·프랑스 등 G7 국가들은 모두 테러 지원국인가.

후쿠시마 원전 앞바다 시료, 그리고 탱크 저장 오염수 시료를 분석하는 IAEA 조사팀 두 곳에 모두 들어가 있는 우리 대한민국 과학자들은 독극물 용인자들이란 말인가.

할 말, 못할 말이 따로 있는 법이다.

선동만 할 게 아니라 단단한 과학적 논거를 대면서 국민의 안심을 얻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게 정치의 수준이다.

지난 2021년 2월13일에 촬영한 후쿠시마 제1원전의 오염수 탱크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지난 2021년 2월13일에 촬영한 후쿠시마 제1원전의 오염수 탱크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지난 주말 G7 정상회의가 열린 히로시마에서 새삼 절감한 건 G7 국가와 참관국의 격차였다.

G8 반열에 올라서려면 국력뿐 아니라 국격도 뒤따라야 한다. 법과 국제질서 존중이 핵심이다.

G7은 공동성명에서 "안전 기준과 국제법에 따라 수행될 IAEA의 독립적 검증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 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우리만 뚜렷한 근거 없이 중국이나 북한처럼 IAEA를 부정해서야, 그리고 과학을 '헛소리'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김남국 코인 파동에는 "확인되지 않은 걸 진실인 양 부풀리고 있다"고 하면서 뒤돌아선 똑같은 행태를 보여서 되겠는가.

거듭 말하지만 난 이제 2011년 원전 사고의 끔찍한 기억보다 그 이후 매년 숫자로 찍혀 나오는 내 몸 안의 매우 낮은 방사능 측정 결과를 믿는다.

그리고 바다의 오염보다 우리 정치의 오염을 걱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