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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문 전 대통령의 불편한 처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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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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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이 수상하다. 퇴임 후 수염 기르고, 자유를 만끽하나 싶더니 올 들어 행보가 부쩍 복잡해졌다. 제주 4·3평화공원,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아다녔다. 추모만 하는 게 아니라 어김없이 정치색 짙은 말을 남겼다. “4·3을 모독하는 행위가 이뤄지고 있어 개탄스럽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게 정치인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 “잊혀지고 싶다”는 당초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외려 잊혀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고비마다 정치적 메시지를 내는 퇴임 대통령은 낯설다.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참배·책방·영화·SNS…자기 정치
“잊혀지겠다”면서 고비마다 메시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 여기는 듯
퇴임 후 정치 행보, 나쁜 전례 될 것

지난달 양산 사저 근처에 ‘평산책방’을 냈다. 이달엔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를 개봉했다. 마치 정치를 다시 준비하는 사람 같다. 주민을 위해 책방을 열었다지만, 오롯이 그를 위한 정치 공간이다. 팬 미팅장이고, 친문의 성지가 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다녀갔다. 그 자리에서 문 전 대통령은 “대화는 정치인의 의무”라며 윤석열 대통령을 에둘러 비판했다. ‘불통 대통령’이었던 그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라의 어른답게 정파를 떠나 덕담을 했어야 했다.

책방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무급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가 사달이 났다. ‘돈도 안 주고 일 시키느냐’는 반발을 불렀다. 책방 측은 “과욕이었다”며 철회했지만, 문 전 대통령은 일언반구도 없다. 재임 당시 불리하면 침묵하던 모습 그대로다. 공익사업이라면서 사업자 명의를 처음에 재단이 아닌 문 전 대통령 개인으로 한 것도 논란이 됐다. 책방 곳곳에 ‘장삿속’이 묻어난다는 지적은 옆에서 듣기에도 불편하다. 이런 걸 자꾸 얘기하면 한마디 할지 모른다. “그 정도 하시지요, 좀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영화 ‘문재인입니다’는 또 다른 논란거리다. 잊혀지겠다고 해놓고, 한편에선 홍보 영화를 준비한 게 놀랍다. 애초에 잊혀질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닌가. 편집 과정에서 삭제했다는 그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5년간 이룬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져 허망한 생각이 든다.”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영화를 본 뒤 “문 전 대통령을 꼭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결의를 다졌다. 퇴임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영화는 실패했다. 관객 수는 개봉 2주 동안 10만 명 남짓. 185만 명이 본 ‘노무현입니다’와 비교된다. 관람평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싸움판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지켜보는 국민은 착잡하다.

지난 2월에는 문 전 대통령이 SNS를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책을 거론했다. “저자의 역량을 새삼 확인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조국이 자녀 입시 비리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은 지 1주일 지난 때였다.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언급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임 대통령의 말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조국에게 애틋함이 있다면 따로 연락하면 될 일이다. 굳이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조국을 택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행동이다.

퇴임 대통령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은 없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숨을 이유는 없다. 자신의 경륜을 활용할 일이 있으면 좋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도 괜찮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해외를 순방하고, 헨리 키신저·매들린 올브라이트 같은 명사들과 교류하며 말년을 보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환경 쌀, 숲 가꾸기, 생태하천 복원에 열정을 쏟았다. 미국에선 지미 카터가 모범 사례다. 퇴임 후 전 세계 빈민촌에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했고, 분쟁지역에서 중재를 끌어냈다. 무능 대통령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거듭났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조지 W 부시는 화가로 변신해 대통령 때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퇴임 후 그림에 전념했다. 분명한 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아름답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는다.

유감스럽게 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에 끼어든다. 정상까지 오르고 하산했지만 내려놓지 않는다. 참배·책방·영화·SNS…. 뭔가 끝없이 도모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린다. “(여권이) 끊임없이 나를 현실 정치로 소환하고 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여기는 듯하다. 지난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다음 정부는 우리 정부 성과와 비교받을 것”이라며 덕담 대신 적개심을 보였다. 증오의 정치 프레임이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낯 뜨거운 자화자찬도 이런 심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지난해 5월 물러나면서 지지자들에게 “(제가)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까”라고 물어 “네”라는 답변을 끌어냈다. 통상 그런 자리에선 ‘그동안 부족한 저를 응원해 줘서 감사하다’며 자신을 낮추는 게 품격 있는 태도다. 성과를 부풀리며 세력을 규합하는 협량을 드러낸 것이다. 나라를 쪼개는 비극은 집권 5년으로 충분하다. 퇴임 대통령의 정치 개입이라는 불행한 전례를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