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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글로컬 협력, 한·일 관계의 새 프런티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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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양기웅 한림대 글로벌협력대학원장

양기웅 한림대 글로벌협력대학원장

대한민국 동해와 마주하고 있는 일본 돗토리(鳥取)현은 역사적으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 1819년 1월 돗토리 아카사키(赤崎) 관헌은 강원도 평해군(1914년 경북 울진군에 통폐합)에서 출발한 조선 상선을 구조했다. 배에는 안의기 선장을 비롯해 12명이 타고 있었고, 폭풍우로 석 달 동안 돗토리에 머물렀다. 이후 돗토리 번(藩) 측의 도움을 받아 나가사키와 쓰시마를 거쳐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안 선장은 감사의 글을 남겼다.

안 선장 일행 구조 이야기는 1996년 강원도와 돗토리현의 자매결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두 지역은 우정을 쌓아왔다. 돗토리현은 지난해 동해안 산불사태를 비롯해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12차례나 성금을 보내왔다. 강원도도 돗토리현에 지진 피해 성금을 보내 상호 선린 우의를 다져왔다.

셔틀외교 재개로 관계 정상화
단절된 지자체 교류 복원해야
경제·기후 등 협력할 분야 많아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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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일 관계는 2000년대 들어 외교적으로 긴장이 고조되면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고, 지자체 교류도 사실상 중단됐다. 일본의 무역 규제 여파로 2019년 10월엔 돗토리와 한국을 잇는 직항편이 끊겼다. 강원도 동해항과 돗토리 사카이미나토항을 오가는 ‘이스턴 드림’호도 2020년 4월부터 운항이 중단됐다.

하지만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의 강제징용 해법 제시를 계기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상호 방문을 통한 정상회담으로 12년 만에 셔틀 외교가 복원됐다. 그 와중에 한·일 지방자치단체 간 교류 협력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강원도도 교류 협력 복원에 팔을 걷어붙일 태세다.

한·일의 외교 관계 복원은 미국의 적극적 역할, 한·일의 이념과 가치 공유, 급변하는 인도·태평양 정세,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한·일 양국은 대북 억지 등 안보 차원에서 상호 협력을 통한 이익 증대를 도모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협력처럼 한·일 협력 자체가 국제 공공재가 될 수도 있다.

한·일은 기후 에너지와 공급망 분야에서도 협력이 가능하다. 스마트 그리드, 미래형 도시, 그린 수소와 암모니아 공급망 구축, 탄소 중립 등이 좋은 사례다. 일본 ‘소·부·장’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면 대일 무역적자 개선과 역내 반도체 공급망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일 협력은 국가 차원의 외교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앞으로 한·일 관계는 지방과 세계가 연결되는 ‘글로컬(glocal)’ 협력의 형태로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 주민의 삶의 질 향상, 지역 경쟁력 강화라는 패러다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방의 공공외교와 글로컬 협력이 지역 경제에 주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영국의 맨체스터는 중국 우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일본 오사카 등 세계 주요 공업 도시와 결연해 도시의 매력을 높이고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글로컬 협력은 국가 차원의 경쟁과 대립이 발생할 때 완충 역할도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상호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는 1000개 도시의 결연을 통해 지역 간 교류를 촉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유럽에서 도시 간 협력을 촉진하는 ‘유로 시티 네트워크’로 이어졌다.

한국과 일본은 인구 감소, 지방 소멸, 저성장 위기 대응을 위해 글로컬 교류 협력이 더욱 절실하다. 이를 통해 농수산물 수출 확대,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치, 글로벌 ‘관계 인구’의 형성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다. 지역의 자연환경, 문화적 자산을 활용하면서 혁신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글로컬 크리에이터와 창의적 스타트업 간의 협력도 가능하다. 지역 대학들도 지자체 및 지역 기업과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일본 도시들의 산·관·연 네트워크와 연결해 과감한 대도약을 시도할 수 있다.

한·일의 지역 강소기업들은 상호투자, 자원 공동구매, 공급망 협력, 인적교류, 제3국 진출 확대, 신산업 협력 등 경제교류를 확대함으로써 지방을 글로벌 신사업의 거점으로 키울 수 있다. 이러한 한·일 지방간 글로컬 협력은 한·일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지속가능한 한·일 관계는 지방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일 관계의 프런티어로 글로컬 협력의 잠재력에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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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웅 한림대 글로벌협력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