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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채병건의 시선

북핵이 부른 보수의 핵 자강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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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자체 핵 개발과 전술핵 재반입에 선을 그은 한미 워싱턴선언이 발표된 직후 보수층 일부의 초반 반응엔 ‘성에 차지 않는다’도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백악관 국빈 만찬과 의회 합동 연설이 호평을 받은 게 알려지면서 누그러졌지만, 보수층 일부는 폭주하는 북핵에 대응하기 위해 당초 화끈한 걸 기대했다가 아쉬움을 느꼈다. 보수 성향의 한 전직 외교관은 사석에서 “이젠 트럼프가 다음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며 “이런 경우의 수까지 생각하면 NPT(핵확산금지조약) 준수를 굳이 선언에 못 박을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금기의 영역이었던 핵 무장론
트럼프 미군 철수론이 불붙여
문 정부 대북정책 실패도 한몫
현실적으론 차선책 고민할 때

쉽지 않을 걸 알면서도 보수 여론이 내심 한방 대책을 기대했던 이유는 북한이 핵 탑재가 가능하다는 미사일을 폭죽처럼 쏘아 올리며 위협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다음과 같이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이념 보수, 즉 동맹 보수다. 6·25남침의 경험에서 반공에 기반해 한·미 안보 동맹을 필수 전제로 삼는 이들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책임이라는 두 가치 중 전자를 선택하는 이들이다. 삶의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는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당연시하는 행동규범의 보수다. 대체로 한국의 보수는 앞에서 보면 ‘동맹파’고, 뒤에서 보면 ‘작주(作主)파’다.

그런데 지난 수년간 북핵을 놓고 이념 보수, 행동규범 보수에 미묘한 변화가 더해졌다. 이 색채를 ‘자강 보수’로 이름 붙이고 싶다. 미국에만 안보를 의탁해선 곤란하고 우리도 스스로를 더 책임지기 위해 플랜B를 준비해야 한다는 보수다. 플랜B의 가장 공격적인 주장이 핵 반입, 핵 개발이다. 지난해 12월 중앙일보와 서울대아시아연구소의 여론조사(한국리서치 실시)에 따르면 ‘북핵 억제를 위해 전술핵 재배치가 불가피하다’는 응답은 보수 응답자에선 73.1%에 달했다. ‘득보다 실이 많아 불필요하다’는 19.0%였다. 반면 자신을 진보라고 규정한 응답자에선 ‘재배치 불가피’(35.6%)보다 ‘재배치 불필요’(49.7%)가 더 많았다.

북핵 위기의식을 자극한 건 북한의 폭주였다. 북한은 핵물질-핵탄두-발사체라는 핵 무력의 세 축을 완성한 상태다. 여기에 한반도 핵 상황을 대하는 지난 문재인·트럼프 정부의 자세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꺼내 든 주한미군 철수 카드는 한국 사회에서 독자 핵무장 주장에 불을 붙였다. 7년 전 미 대선을 앞두고 현지 특파원으로 미 공화·민주의 지한파 하원의원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적을 불문하고 공히 “한반도 방어 약속은 유지된다. 미국은 대통령이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의회가 있다”고 확언했다. 그런데 겪어보니 미국 대통령 한마디에 주한미군의 미래가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있다가 없다가 했다. 미군이 철수하면 북핵 인계철선까지 사라진다. 이런 논리적 귀결이 그간 금기의 영역인 핵무장론을 한국 사회에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문재인 정부 전반기 남북 정상회담은 북핵 해결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내걸었던 한반도 운전자론은 2019년 판문점 북·미 정상 회동에서 드러났듯 미국과 북한 모두로부터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북핵 해법을 찾지 못한 채 남북 화해 협력으로 우회로를 뚫으려다 임기를 마감했다. 남은 건 정상회담 사진뿐이다. 플래시만 터트리다가 핵 상황은 더 악화한 지난 한미 정부를 지켜본 뒤 굳어진 생각이 ‘플랜B를 찾아보자’다.

그렇다면 보수의 자강론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독자 핵무장과 핵 재반입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윤 대통령이 방미 기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피력한 대로 핵 개발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며 정치적·경제적으로 복잡한 방정식이 얽혀 있다. 따라서 핵 무장, 핵 반입을 제외한다면 핵협의그룹(NCG)을 한국이 미군 핵에 최대한 접근하도록 운용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 독자 핵무장론은 한국민이 북핵을 놓고 인내의 임계점으로 향하고 있음을 북한과 국제사회에 알린다는 점에선 효과적이지만, 현실에선 정치·경제적 방정식을 따라야 한다. 한국의 속내를 너무 잘 아는 스콧 스나이더 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은 중앙일보 서면 인터뷰에서 만약 NCG가 한국의 북핵 대응 능력을 차단하는 것으로 한국 사회 주류가 받아들인다면 “한·미동맹의 성패까지 가르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독자 핵무장을 경계하는 미국 조야의 시선을 그가 솔직하게 알린 거라 생각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지만, 북핵은 우리 선택지가 묶인 채 억지력은 확보해야 하는 난제 중의 난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