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청년·가족·인간·미남…새로운 이름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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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영원한 것은 없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23년 4월 말 서울 도봉구는 청년 연령의 상한을 39세에서 45세로 상향 조정했다. 이보다 앞서 2023년 2월, 목포시 시의회 역시 청년 연령 상한을 39세에서 45세로 상향 조정한 바 있다. 도봉구나 목포시는 왜 이런 일을 했을까. 다들 바쁠 텐데 왜 굳이 청년(의 범위)을 재정의하려 한 것일까. 심심해서? 그럴 리가.

한없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이 만든 것일 뿐

성공·도덕·정의·애국도 마찬가지
특정 시공간의 이해관계 결과물

조건이 변하면 다시 만들어야
제때에 새로 만드는 것도 역량

청년 상한을 45세로 올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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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치의 저변에는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청년 연령을 상향함으로써 기존에 중장년으로 취급되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청년으로 분류되게 된다. 따라서 해당 지자체 공무원들은 청년 인구 감소라는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한 셈이 된다. 지자체 공무원뿐 아니다. 지금껏 청년 융자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던 이들이 이제 청년에 포함되어 융자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모두에게 좋은 일일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산은 결국 한정 자원이다. 어떤 사업의 예산이 늘어나면 다른 사업의 예산은 줄어드는 경우가 많다.

이게 어디 청년 문제뿐이랴. 대표적인 성인 질환 중 하나인 고혈압도 마찬가지다. 2022년 대한고혈압학회는 고혈압 환자의 수축기 목표 혈압을 140㎜Hg 미만에서 130㎜Hg 미만으로 낮춘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로 인해, 기존에 고혈압 환자가 아니던 사람도 느닷없이 고혈압 환자가 되어버렸다. 대한고혈압학회는 왜 이런 일을 했을까. 다들 바쁠 텐데 왜 굳이 고혈압(의 범위)을 재정의하려 한 것일까. 심심해서? 그럴 리가.

의도와 무관하게 이런 조치의 저변에는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고혈압의 범위가 바뀜에 따라, 전보다 많은 사람이 고혈압 환자로 탈바꿈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고혈압 환자가 새로이 병원에 다니게 될 것이고, 고혈압약을 제조해서 파는 회사는 전보다 많은 수익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다. 건강 관련 보험을 취급하는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사람은 건강 관련 보험계약에서 다른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혼인·혈연만이 가족의 조건?

원시시대부터 유구하게 존재해 온 느낌을 주는 ‘가족’이라는 것은 어떤가. 2021년 여성가족부는 4차 건강 가족 기본계획에서 법적 가족의 범주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보다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 포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논의는 큰 현실적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끝에 지난 4월, 혼인이나 혈연을 통해 맺어지지 않은 이들도 가족으로서 법적 권리를 인정하고자 하는 취지를 가진 ‘생활동반자법’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이런 흐름의 저변에도 현실적 이해관계가 있다. 오랫동안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동거했으나, 상속에서 배제될 뿐 아니라,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반면, 누구보다도 소원한 관계가 되었으나 어딘가에 혈연이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로 독거노인을 위한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힘들게 혼자 사는 노인도 있다.

사정이 어떻든 가족이 있는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소피 루이스는 『가족을 폐지하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가족을 폐지하라’는 표현에 거의 반사적으로 ‘그렇지만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고’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행운아라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가족을 사랑한다니 참 다행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가족을 폐지하라” 도발적 선언

생활동반자법에 반대하는 사람 중에, 아니 “피를 섞지 않았는데도” 가족이라고? 결혼하지 않았는데도 가족이라고? 이렇게 반문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가족이라는 것은 얼마나 가변적인 존재였는가. 국가가 가난한 이들을 책임지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못할 때, 가족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친족이 보다 많은 이들의 복지를 떠안도록 시도한 역사가 있다. 그뿐이랴. ‘양자’라는 것은 혈연을 넘어선 가족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 얼마나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던가.

이처럼 평소에 당연시되던 것들 대다수가 실은 인간이 정의한 것들, 즉 인간이 (부분적으로나마) 구성한 것들이다. 즉, 꼭 당연하지만은 않은 것들이다. 영원하지는 않은 것들이다. 어디 고혈압이나 청년이나 가족 같은 것들뿐이겠는가. 남자라는 것도, 여자라는 것도, 민족이라는 것도 상당 부분 그렇다. 이른바 ‘좋은 대학’ ‘성공한 인생’ 같은 뻔한 사례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특정 시공간을 사는 인간이, 당시의 이해관계와 정당성을 고려해 온 결과물이다.

그 모든 것들을 (부분적으로나마) 만들어왔다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가. 그것도 구성된 것인가? 1950년대에 주로 활약한 소설가 김성한의 단편 소설 ‘방황’의 주인공 만식의 말을 들어보자. “배부른 작자들은 인간이라는 것을 창조해냈겠다. 그리하여 인간은 동물이라는 생물과 구별하였겠다. 자기네는 동물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잘났다고. 배는 부르고 할 일은 없으니 머릿속에서 갖은 요물을 조작해 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요물 위에다가 가지각색 색동저고리를 입혔겠다. 도덕이다, 정의다, 의리다, 인간애다, 애국이다, 애족이다, 가치다….”

김성한의 단편 ‘방황’이 말하는 것

도덕, 정의, 의리, 애국, 인간…. 이 엄청난 것들이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라니. 문제는, 그 인간 현실의 상당 부분이 ‘색동저고리’에 어울리지 않게 더럽다는 사실이다. 그런 인간 현실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만식은 “요놈의 인간 연극을 뒤집어엎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것들이 신이 부여한 본성이 아니라, 한심한 필멸자인 인간이 만든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만식은 썩고 위선적인 사회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처럼 행동한다. 기차역에 적재된 석탄을 멋대로 가져다 쓰고, 무전취식을 하고, 나쁜 사람을 보면 때리기도 하다가, 결국 경찰서에 잡혀 온다. 형사가 취조를 시작하자,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넌 그래 인간이 아니야?” “생물이라니까.” 지친 형사는 끝내 정신과 의사를 불러 검진을 받게 한 뒤, 만식을 인간 취급하여 훈방한다.

인간성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정한 것이고, 그만큼 가변적인 것일 텐데. 만식은 인간 혹은 자신을 재정의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모든 것이 가변적이라고 한들, 만사가 한 사람의 선언에 의해 바뀌지는 않는다. 어느 중년 남자가 집에서 거울을 보며 “나는 절세 미남이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갑자기 미남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미남의 정의가 시대별로 다르고, 사회마다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적인 범주인 한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승인을 필요로 한다.

미남은 당대의 상징적인 지표

어렸을 때 엄마가 나보고 미남이라고 그랬어, 정도의 승인은 미남이 되기에 너무 부족하다. 엄마의 승인을 바탕으로 해서, 밖에 나가 미남 행세를 했다가는 차가운 조소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가 꼭 자식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고, 우리 아들은 미남이야”라고 말할 때, 엄마는 진심일 수 있다. 추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심오한 아름다움을 자식의 얼굴에서 실제로 느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은 주관적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

주관적이라니, 그러면 미남에 대한 객관적 지표 같은 것이 있단 말인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미남의 표준 같은 것은 아마도 없겠지. 그러나 당대의 상징적인 지표 같은 것은 있지 않을까. 레스토랑 복도를 지나다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를 마주친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주치는 순간 아름다운 발광체를 목격한다는 느낌이 번쩍 일었고, 곧 복도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왜 갑자기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 거지? 왜긴. 느닷없이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아서겠지. 이 정도 되면, 자타가 공인하는 객관적(?) 미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사회적으로 시효가 다했다는 증거가 넘치는데도, 여전히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이 있다. 이미 도래한 지 충분한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 제 이름을 얻지 못한 것들도 있다. 세상을 보다 견딜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는 이름이 필요한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과거의 이름을 재정의하는 작업들도 포함된다. 여건이 성숙해갈 때, 새로운 정의를 늦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것도 그 사회의 역량이다. 어느 정도가 되면 성숙한 거냐고? ‘성숙’ 역시 구성된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