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카메라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스티븐 스필버그는 일찌감치 재능을 꽃피운 영화 천재다. 블록버스터, 즉 강력한 폭탄처럼 위력을 떨치는 흥행 영화의 원조로 꼽히는 ‘조스’(1975)는 그가 서른도 되기 전에 만든 작품이다.

이에 4년 앞서 만든 TV 영화 ‘듀얼’(1971)에서도 그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구구절절 설명 없이 큼직한 트럭의 등장과 질주만으로도 서스펜스와 공포감을 빚어낸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가 이미 10대 시절부터 영화를 찍은 것도 유명한 일이다. 요즘이야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찍지만, 그의 성장기에는 8㎜ 카메라 같은 촬영 장비가 있는 집이 흔하지 않았다. 카메라까지 사준 걸 보면, 그 부모 역시 아들의 재능을 알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 [사진 CJ ENM]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 [사진 CJ ENM]

이런 피상적 이미지와 달리, 그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성장기를 드러낸다. 유대인 소년 샘(가브리엘 라벨)은 그의 분신이자 주인공. 샘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학교를 여러 번 옮기는데, 그중 한 곳에서는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게다가 부모의 이혼은 샘과 누이들에게 큰 시련을 안겼다. 영화는 이혼 전후 가족의 상황은 물론이고, 스필버그가 평생 비밀처럼 간직해온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보여준다.

놀라운 건 이런 대담함만이 아니다. 영화에는 카메라를 들고 뭔가를 찍는 일이, 또 그렇게 찍히는 일이 빚어내는 뜻밖의 순간들이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샘이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과정도 그렇지만, 샘의 여러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의 반응 역시 예상과는 다를 때가 있다. 가짜임이 분명한 상황에 진짜처럼 빠져드는가 하면, 반대로 실제를 찍은 것인데도 진짜와의 괴리를 느끼며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영화이자, 영화와 창작의 속성에 대한 예리한 성찰이 담긴 영화로 만들어냈다. 그는 이 영화를 오래 준비했다. 영화를 보면 짐작할 수 있는데, 각각 2020년과 2017년 세상을 떠난 부모 생전에는 만들기 쉽지 않았을 이야기다. 개인적 감상에 빠지는 대신 이제껏 연출한 어떤 영화 못지않은 완성도를 구현해낸 점도 놀랍다. 모르긴 몰라도, 챗GPT 같은 AI에게 주문해서 나올 수 있는 시나리오는 아니다.

스필버그 영화 중에 꼭 언급해야 할 작품이라면 ‘A.I’(2001)도 있다. 할리 조엘 오스몬드가 아역 시절 연기한 주인공 소년은 인간이 아니면서도, 어떤 인간보다 더 절절하게 인간 부모의 사랑을 갈구한다. 여기에 ‘E.T’(1984)까지 더해, 이후로 스필버그의 영화를 논할 때마다 ‘파벨만스’는 그 분석에 참고로 언급될 터다. 재능 넘치는 감독일 뿐 아니라 성장통을 겪어낸 어른이 만들어낸 영화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