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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말 못한채 이별…말기환자만 허용한 '벼락치기 존엄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4월 초 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지난 4월 초 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미루고 미루다 임종 직전 연명의료 중단(일명 존엄사)을 결정하는 소위 ‘벼락치기 존엄사’를 개선하라는 대통령 소속 위원회의 권고가 나왔다.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이하 국생위)는 22일 연명의료결정제도 개선 권고안을 확정해 정부에 통보했다. 국생위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는 시기를 ‘말기환자 등’으로 제한한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말기환자는 적극적으로 치료해도 회복 가능성이 없고 점차 악화하는 경우를 말한다. 담당 의사의 진단이 필요하다.

백수진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생명윤리센터장은 “의사들이 말기 진단을 하게 되면 진료를 포기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부담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시기를 놓치고, 계속 늦어진다. 막판에 작성하거나 가족이 결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말기환자 제한을 없애면 훨씬 이전인 암 진단 때 작성하거나 고령의 장기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의사의 설명을 듣고 연명계획서를 작성하게 된다. 미리 이 서류를 작성한 뒤 사망장소를 선택하고,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길 수 있으며 가족·친지·친구와 화해할 수 있다.

연명의료결정제도는 2018년 2월 시행돼 지난해 말 기준으로 26만명이 존엄사를 택하고 세상을 떴다. 건강할 때 미리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157만명에 달할 정도로 빠르게 확산한다. 하지만 연명의료 중단을 이행한 사람의 83%가 임종상황에 닥쳐서 가족이 결정한다. 상당수 환자가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한 날에 의사가 연명의료 중단 이행서를 작성한다. 이 같은 벼락치기가 진정한 의미의 웰다잉과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중앙일보 4월 3,4일자 1,4,5면〉

국생위는 권고문에서 “연명의료계획서는 환자가 병 상태와 예후 등을 알고 (연명의료 중단 관련) 명시적인 결정을 하는 것으로, 말기환자와 같은 의학적 진단과는 무관하다”며 “환자가 의사결정 능력이 있을 때 적절한 시기에 의사와 함께 작성하도록 법을 개정하되 의사 교육이나 설명 의무 확대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생위는 존엄사 사각지대로 방치된 요양병원의 문제점을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연명의료 중단(유보)을 이행하려면 의료기관윤리위원회(이하 윤리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국 1433곳의 요양병원 중 105곳만 있다. 그래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사람이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임종상황이 되면 큰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다. 국생위는 “요양병원이 연명의료결정제도에 들어오지 못하는 장애물로 윤리위가 거론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사각지대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윤리위 설치를 지원하거나 공용윤리위 활성화를 도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초 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지난 4월 초 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국생위는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를 대신해 윤리위나 공용윤리위 등에서 연명의료 중단 등을 결정하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지금은 무연고자는 연명의료 중단을 이행할 방법이 없다. 국생위는 또 생애 말기 돌봄 유형을 다양화하고 장단기 서비스 향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국생위는 국회에 입법 발의된 의사조력자살과 관련, “죽음의 시기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거나 관련 법률을 제정·개정하려면 충분한 토론과 숙고를 거치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국생원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오남용에 대해서도 충분하고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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