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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로버트 케네디, 덩샤오핑, DJ… 그 다음은 누굴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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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논설위원

서승욱 논설위원

도쿄에서 본 한·일관계 개선의 키

"아~오랜만입니다."
 지난 10일 일본 도쿄행 항공기 속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일본 유력 언론사의 정치·외교 담당 논설위원, 특히 한·일 관계에 정통한 일본인 기자 A씨였다. 필자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의 특별 대담 취재를 위한 일본 출장길이었다. A씨는 반대로 지난 7~8일 기시다 총리의 방한 일정에 맞춰 서울에서 한·일 관계를 취재한 뒤 귀국하는 길이었다.
 도쿄로 또 서울로, 전 정부에선 상상하기 어렵던 해빙 무드가 양국 언론의 상호 취재에도 훈풍을 불게 하는 변화된 현실이 실감 났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을 묻자 A씨가 들려준 이야기가 특히 흥미진진했다. 그는 대뜸 "요미우리(讀賣)신문과의 인터뷰가 결과적으로 절묘한 신의 한 수가 됐다"고 말했다.

3월 16일 방일한 윤석열 대통령이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식당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양국 셔틀 외교를 12년만에 복원시킨 두 정상은 모두 애주가다.[연합뉴스]

3월 16일 방일한 윤석열 대통령이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식당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양국 셔틀 외교를 12년만에 복원시킨 두 정상은 모두 애주가다.[연합뉴스]

"요미우리와의 인터뷰는 절묘한 한 수"
 일본 내 보수 우파를 대표하는 언론은 요미우리와 산케이(産經)신문이다. 그중 요미우리는 발행 부수(2022년 하반기 기준 하루 663만부)가 일본 내 최고다. 그동안은 보수 세력의 입장을 고려해서 한·일 관계 개선에 상대적으로 인색한 편이었다. 그런 요미우리가 3월 윤 대통령의 방일 직전 무려 9개 면에 걸친 인터뷰를 대서특필한 뒤 양국 관계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논조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비단 A씨만의 견해가 아니었다. 도쿄 현지에서 만난 진보 성향 언론의 서울특파원 출신 B씨도 "요미우리가 가세하면서 (우익 성향) 산케이를 빼면 한·일 관계 개선을 응원하는 쪽이 우세한 상황으로 구도가 바뀌었고, 이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대일외교에 대한 윤 대통령의 입장이 요미우리를 통해 전파된 데다 3월 일본 방문 당시 보여준 우호적인 퍼포먼스까지 겹치면서 호감도가 꽤 상승했다고 B씨는 설명했다.
 실제로 일본 언론들에선 "관계 개선을 위한 윤 대통령의 열의는 진짜"라거나 "일본도 할 수 있는 건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외교, 특히 역사 문제가 민감하게 얽힌 국가 간 외교라면 상대방 지도자에 대한 여론의 호감도 역시 중요한 변수다. 한·일 관계도 예외일 수 없다.

민주주의 각인한 로버트 케네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60년 동안 일본을 방문한 세 명의 외국 지도자들은 일본 국민이 근본적으로 상대국을 바라보던 방식을 바꿔 버릴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미국의 대표적인 동아시아 전문가인 에즈라 보걸(2020년 작고) 전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쓴 『덩샤오핑 평전』의 한 대목이다. 대통령실 내부에서도 이 내용이 화제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도쿄를 오가는 항공기 속에서 책을 훑어봤다.
 보걸 교수가 꼽은 세 명의 지도자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중국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한국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었다. 보걸 교수는 로버트 케네디에 대해 "1960년대 초 그가 일본 학생이나 시민들과 나눴던 솔직하고 생생한 대화는 일본인이 외국 지도자들에게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며 "활력, 신선하고 젊은 이상주의 정신, 전 세계 인도주의 사업에 이바지하려는 진실한 희망, 다른 이들의 관점에 대한 확실한 존중 등은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한 일본인의 이해를 심화시켰고, 미국에 대한 호감을 더해 줬다"고 썼다.

1978년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후쿠다 다케오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8년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후쿠다 다케오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솔직하고 당당했던 덩샤오핑
 그다음으로 언급된 덩샤오핑의 일본 방문은 1978년 10월 19~29일에 이뤄졌다. 덩샤오핑은 "20세기에 불행한 과거가 있긴 했지만 양국은 2000년 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며 손을 내밀었다. 첨단기술 등 패망 이후 일본이 이룬 '성취'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당당했고, 자신이 있었고, 유연했다. "못생겼는데도 미인처럼 치장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라면서 "중국은 결점을 인정해야 하고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말도 했다. 중국의 현대화를 추진했던 실용주의자다운 면모였다.
 일본과 영토 다툼이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엔 "후대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총명해 능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현명한'(보걸 교수의 평가) 답변을 했다. 보걸 교수는 이런 거침없는 태도에 대한 일본인의 반응을 전하며 "드라마와 같은 인상을 남겼다"고 평했다.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합의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1998년 도쿄 영빈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합의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1998년 도쿄 영빈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진실한 연설로 일본 움직인 DJ
 그다음이 DJ였다. 1998년 10월 방일해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DJ-오부치 선언)을 맺은 그에 대해 보걸 교수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깊은 적대감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한 연설이 일본을 크게 감동시켰다"고 평가했다. DJ는 일왕을 두 번이나 천황 폐하라 부르며 "호칭은 그 나라 국민이 불러주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 외교"라고 말했다. 옛 일본인 스승과의 만남에선 일본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파격이 일본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강렬한 만남은 정책의 성과로, 그리고 양국 관계의 도약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 방일 이후 일본 문화의 중국 수출이 시작됐고, 이런 흐름은 양국 간 내각급 연석회의(1980년) 개최 등 정치 분야 교류 확대로 확대됐다. DJ가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과감한 개방 결단으로 현재 K문화 융성의 토대를 닦은 것도 1998년 방일이 계기였다.

대통령실이 주목한 『덩샤오핑 평전』
 로버트 케네디와 덩샤오핑, DJ에 대한 보걸 교수의 평가는 최근 윤 대통령과 참모들 간 대화에서도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12년 만에 복원된 셔틀 외교의 순풍을 타고 한·일 양국에서 상대방 지도자에 대한 우호적 무드가 조성될 경우 이를 기반으로 양국 관계에 새로운 장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여권 내부엔 강하다. "1965년의 양국 국교정상화가 첫 기점, 1998년 DJ-오부치 선언이 중간 기점이라면 윤석열-기시다의 양국 관계 개선 작업이 획기적인 새 기점이 될 수 있다"(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는 바람도 나온다.
 하지만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이런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한국 내 여론을 견인할 일본의 노력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이 일본 여론을 움직였듯 기시다 총리도 진정성으로 한국 여론을 움직여야 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에 대한 한국민의 반감이 양국 관계 진전에 부정적 변수로 작용했던 전례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뒤 아베 전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는 등의 후속 조치에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잘라 말한 일은 한국인의 뇌리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반전 가요도 불렀던 기시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7일 서울 방문 때 "나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수많은 분이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과거사와 관련해 진전된 입장을 취했다. 또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공동 참배를 윤 대통령에게 제안해 성사시켰다.
 그는 정치적 입장과 신념, 역사관이 아베 전 총리와는 다르다. 자민당 내 강경 보수파인 아베파와는 차별화되는 중도 온건파 고치카이(宏池會)의 수장이다. 또 원폭 피해를 본 히로시마가 지역구다. 2018년엔 가라오케에서 마이크를 잡고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이란 대표적인 반전 가요를 부른 사실이 일본 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외상 시절이던 2015년 위안부 협상 당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표현이 담긴 합의문에 아베가 난색을 보이자 “여기서 매듭짓고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는 뒷얘기도 있다. 덩샤오핑과 DJ가 일본 국민에게 그랬듯 그 역시 한국 국민에게 꾸준히 손을 내밀며 자신만의 진면목을 보여줘야 한국 내의 쌀쌀한 여론이 조금씩 움직일 것이다.
 12년 만의 셔틀 외교 복원 뒤 진행된 지난 9~11일 한국갤럽의 조사에선 기시다 총리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있었는지라는 질문에 '전보다 좋아졌다'가 25%, '나빠졌다'가 12%, '변화 없다' 48%였다. 약간의 반등이 있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무려 4년 7개월간 외상을 지낸 기시다, 외교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걸 그도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