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통상 측면에서 보면 거의 전시 상황이다. 지금 산업계와 정부가 이인삼각 체제로 돌아가고 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년을 이렇게 평가했다. 반시장정책 등으로 산업계와 다소 소원했던 지난 정부와 달리, 이번 정부 들어 민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통상 대응 능력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핵심광물·공급망 주요국과 연대
올해 TIPF 20개 이상 체결 목표
첨단산업 국내 투자 증가 추세
‘아시아 투자 허브’ 적극 홍보
‘글로벌 통상 중추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으로는 ‘무역투자프레임워크(TIPF; Trade & InvestmentPromotion Framework)’를 제시했다. 올해 20개 이상 국가와 TIPF를 체결하는 게 목표다. 자유무역협정(FTA)이 당장 힘들거나 전략적 협력이 필요한 국가와 관세 양허를 제외한 무역·투자·공급망·에너지 등의 포괄적 협력 체계인 TIPF를 맺어 유대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시장 개방 중심의 기존 FTA 대신에 공급망 등 새로운 통상 협력이 추가된 경제동반자협정(EPA;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으로 FTA 추진 방향도 업그레이드됐다. 자원과 인구가 풍부한 신흥국과 호혜적 통상 연대를 구축해 올해 10개 이상 국가와의 EPA 타결을 목표로 잡았다.
안 본부장은 “FTA가 돼 있으면 경제 영토라고 하고 FTA가 안 돼 있으면 무슨 황무지처럼 취급했는데, 이들 국가들도 핵심 광물이나 공급망 등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가 많다”고 했다. TIPF를 통해 우리나라와 우리 산업에 대한 이들 국가의 관심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안 본부장은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 등과 TIPF를 맺었고 UAE와는 바이오 EPA, 디지털 EPA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김종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FTA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만큼 우리도 유연하게 FTA를 해야 한다”며 “작은 딜도 괜찮고 이름이 달라도 좋다. 공급망·광물자원을 포함해 아프리카 국가와의 협력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김계환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 김종범 연세대 교수,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가나다 순) 등 중앙일보 국가개혁 프로젝트인 리셋 코리아의 통상분과 위원들이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과 만났다. 2시간 동안 진행된 간담회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지금은 ‘새 브레턴우즈 모멘트’
◆통상 환경의 대전환=참석자들은 미·중 패권 경쟁과 자국 우선주의 확산으로 통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미국은 반도체과학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핵심원자재법을 들고 나왔다. 산업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디지털·그린 전환이라는 새로운 규범을 둘러싸고 샅바 싸움도 벌어지고 있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본부장은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새로운 브레턴우즈 모멘트’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격변기다. 첨단 제조와 생산 역량의 글로벌 재편이 벌어지는 산업의 세계 대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재민 서울대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힘든 일이 대한민국 통상장관이 아닐까 한다”며 “현안 대응할 게 워낙 많지만 새로운 환경에서의 우리 위치 재설정, 로드맵 설정 등 전략에 대한 부분도 같이 고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비등비등”
◆“IRA법, 반도체법은 선방”=안 본부장은 정부의 IRA 대처에 문제가 있다는 언론 보도에 불만이 많았다. 리스 판매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전기차 전체적으로도 수출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과를 세세하게 알리지 못한 데에는 상대국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통상 당국의 고충이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과 관련, 안 본부장은 “상당히 비등비등한 상황”이라고 했다.
“가까운 인접 지역인데 FTA를 맺지 않은 곳은 한·중·일밖에 없다”(김종범 연대 교수)는 지적에 안 본부장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한·중·일이 들어가 있어 인프라는 갖춰져 있지만, 각국의 주요 산업과 관련해 상당 부분 양허가 지연됐거나 예외로 한 부분이 있어 개선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아시아의 투자 허브’ 노린다=안 본부장은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의 큰 성과로 59억 달러 투자 유치를 꼽았다. 그는 “지난해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가 305억 달러로 사상 최대였다”며 “한국에 이런 첨단산업의 투자 유치가 안 되면 미래가 없다”고 했다. “기업하기 힘든 한국의 노사 환경이 잘 알려져 있는데도 반도체 장비나 연구개발(R&D)센터 등 첨단산업의 한국 투자가 최근 늘고 있는 건 우리 기술과 미래 성장성을 보고 들어오고 있어서다. 미국의 리딩 기업이 들어오면 유럽과 일본 기업도 따라온다. 우리가 ‘아시아의 투자 허브’라는 메시지를 해외에 계속 알리고 있다.”
한·미 FTA 같은 게임체인저 나와야
◆전문가 제언=정철 KIEP 선임연구위원은 “한·미 FTA는 우리 경제 전반의 체질 개선을 위한 ‘게임 체인저’였다”며 “통상 패러다임이 바뀌는 전환기에 우리의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또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본부장은 “유럽에 이어 미국도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니라 디리스킹(de-risking)을 얘기하는 건 톤다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이라며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사우스(신흥국과 개도국)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송영관 KDI 선임연구위원은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며 “중국이 제조업 기반이 있는 나라와 체결한 FTA는 우리가 거의 유일한데, 현재 낮은 수준으로 체결된 한·중 FTA의 업그레이드 등을 통해 대중 관계에 활용할 방안은 없을지 검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안덕근 본부장=1968년생. 서울대 국제경제학과(86학번)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제학·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를 지내며 국제통상 관련 정책 자문을 활발하게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