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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자' 내세우던 日…韓 희생자 위령비 참배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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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21일 일본 히로시마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고개를 숙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떨어진 지 77년 9개월 15일, 2만 8413일 만의 일이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ㆍ일 양국 정상 내외는 이날 오전 나란히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에 헌화한 뒤 10초 넘게 묵념했다. 참배를 마친 뒤 참배를 지켜본 한국인 피해자 10명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직후 이어진 한ㆍ일 정상회담에서 윤 대통령은 “양국 정상이 함께 (위령비를) 참배하는 것은 최초이며, 한국 대통령이 위령비를 찾아 참배 드린 것도 처음”이라며 “오늘 우리가 함께 참배한 것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해 추모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우리 총리님(기시다 총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 역시 “윤 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며 “이것은 한ㆍ일 양국 관계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국제회의장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국제회의장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는 20만명에 달한다. 이날 양 정상이 함께 참배한 위령비엔 한국인 희생자를 2만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대통령실은 위령비 참배에 대해 “그동안 ‘말’ 위주였던 과거사 해결 노력이 ‘실천’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역사는 긴 세월 축적된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며 “아직 (해결의) 과정에 있고, 양국이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실천적으로, 그리고 좀 더 속도를 내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도 “화해의 역사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를 내놨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1970년 당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에서 ‘바르샤바 게토 봉기 영웅 기념물’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진 한 컷’이 지닌 상징성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며 “한국의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미흡하다’고 평가했던 이유가 일본 측의 말이 아닌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란 관점에서 이번 공동 참배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유태인 희생자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무릎을 꿇고 있다. 당시 '무릎사죄'는 독일과 유태인이 역사적 화해를 이룬 결정적 계기로 평가받는다. 중앙포토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유태인 희생자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무릎을 꿇고 있다. 당시 '무릎사죄'는 독일과 유태인이 역사적 화해를 이룬 결정적 계기로 평가받는다. 중앙포토

이 교수가 언급한 브란트 총리의 ‘무릎사죄’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였던 독일이 피해자였던 이스라엘과 폴란드와 화해하는 결정적 계기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독일은 전범국 이미지를 상당히 씻게 됐다.

실제 한ㆍ일 정상이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가운데 한국인 희생자의 위령비를 함께 참배한 것에 대해 외교가에선 그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라는 점보다 유일한 원폭 피해 국가라는 점만을 부각하며 일종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그쳤던 기존 입장과 다소 차이가 난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는 10만여명의 한국인 군인·군속·징용공·동원 학도 등이 살고 있었다. 일본 총리가 세계 주요국의 정상들이 모인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중에 히로시마에 있던 한국인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것 자체가 당시 전쟁에 동원돼 강제 또는 반강제적으로 일본에 와있던 한국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고 있다. 뉴시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고 있다. 뉴시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기지가 있던 히로시마는 일본의 군수 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강제 징용된 한국인도 많아 원폭 피해도 컸다”며 “이러한 불행했던 과거를 상징하는 장소를 양국 정상이 함께 방문한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사에서 화해라는 측면의 상당한 의미가 있고 앞으로도 유사한 행위를 통해 피해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참배가 그간 '원폭 피해자'라는 점만을 내세워 왔던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로서의 측면을 일부 인정하기 시작한 계기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이 교수 역시 “집권 자민당 내에서 ‘아베파’ 등 강경 세력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시다 총리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한국이 먼저 제시한 강제 징용에 대한 ‘제3자 변제’ 등 해결책에 대해 정치적 최대치를 동원한 화답으로 볼 수 있다”며 “한국이 먼저 채운 ‘물잔의 절반’을 일본 측이 본격적으로 채워가는 본 궤도에 진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당장 한국의 요구 수준까지 이르기는 어렵더라도, 이번 참배를 통해 1923년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등 개별 사건에 대해서도 점진적 사죄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점 역시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덧붙였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이번 참배가 실질적 양국 관계 발전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여전히 일본의 추가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공동 참배 등 아직 일종의 정상 간의 ‘정치ㆍ외교적 이벤트’ 형식에 그치고 있는 관계 개선 노력이 실질적 조치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양국은 이전보다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위령비 참배는 분명 긍정적 시그널이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 일본의 공식적 사죄나 전범 기업의 보상 참여 등 실질적 진전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며 “셔틀외교의 복원, 기시다 총리의 발언, 양국 정상의 위령비 공동 참배 등이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이미지 메이킹’이나 ‘정치ㆍ외교적 타협’에만 그쳐 자칫 이번 결단이 장기적 관점에선 오히려 ‘최악의 관계’를 고착화시킨 계기로 평가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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