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철 체육발전연구원장, 사진전 개최
“이 사진은 ‘제54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선수들이 골인하는 모습입니다. 한국인 3명이 1·2·3등을 하면서 ‘코리아(한국)’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난 19일 오전 전북 전주시 효자동 전북도청 1층 로비. 백발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보스턴 글로브’ 등 미국 신문에 실린 빛바랜 흑백 사진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평안북도 출신 향토사학자
아흔을 훌쩍 넘긴 이 남성은 이인철(96) (사)체육발전연구원장이다. 이 원장은 지난 12일부터 20일까지 9일간 일정으로 전북에서 열린 ‘2023 전북 아시아·태평양(아태) 마스터스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기간 ‘한국 체육 100년 종합사진전’을 열었다.
평안북도가 고향인 그는 일본어로 기록된 『전주부사』 등을 한국어로 번역·발간한 향토사학자다. 『전주부사』는 1932~1942년 전주부(현 전주시)가 전주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집대성한 책이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1·2·3위 휩쓸어
이 원장이 이날 설명한 사진엔 1950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송길윤·최윤칠이 1~3위를 휩쓰는 장면이 담겼다. 당시 2시간32분39초로 우승한 함기용 나이는 만 19세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
함기용 등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정상에 오른 서윤복 뒤를 이어 한국 마라톤을 빛낸 영웅들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관 몇백 명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애국했다”고 했다.
이승만 “외교관 몇백 명보다 애국” 격려
이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보스턴 마라톤 출전을) 재가했는데 1950년 당시 한국엔 비행기가 없어 해외에 나갈 방법이 없었다”며 “(해방 후 미군정 사령관을 지낸) 하지 중장이 우리 정부 부탁을 받고 내준 미 군용기를 손기정 감독이 이끄는 선수단이 타고 일본 도쿄로 간 다음 비행기를 갈아타고 미국에 갔다”고 말했다. 그는 “해방 직후여서 ‘코리아’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던 시절, 보스턴 마라톤에서 한국인이 1·2·3등을 하니 세계가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함기용 등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100m 달리기 등 4관왕을 차지한 미국 육상 선수 제시 오웬스 초청을 받고, 한국 교민이 많이 살던 하와이 호놀룰루에 가서도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언론은 한국 선수단을 대서특필했다. 인터뷰 기사는 물론 ‘한국 대표 음식’이라며 김치까지 소개했다.
“6·25전쟁 후 자료 없어져…송길윤 집서 일부 찾아”
이 원장은 “선수단이 그해 5월 귀국 후 카퍼레이드 등 전국을 도는 환영회에 참가하던 중 6·25 전쟁이 났다”며 “아무 준비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당시 보스턴 마라톤 관련 자료도 싹 없어졌다”고 했다. 함기용은 피란을 가기 전 서울운동장 땅속에 사진을 묻어놨는데 전쟁이 끝난 뒤 가보니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이 원장은 수소문 끝에 2000년대 초반 군산 출신인 송길윤 집에서 보스턴 마라톤 관련 사진과 신문 등을 찾았다. 송길윤은 사망한 뒤였다. 이 원장은 “(2005년) 전북도청 이전 기념으로 현재 청사에서 사진전을 열 때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사진을 처음 공개했다”며 “그때 송길윤 아내와 아들딸이 사진 앞에서 추모한 뒤 ‘역사 속으로 묻힐 뻔한 고인을 조명해 줘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한국 스포츠 위대”
이 원장이 전시회에 출품한 사진들은 한국 체육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1800년대 씨름을 하는 ‘댕기 머리’ 총각들 ▶1924년 ‘제2회 전조선여자정구대회’에 출전한 이화여고 정구선수단 ▶1946년 조선역도연맹 전북지부 결성 당시 전주에 온 백범 김구 등이다. 모두 이 원장이 전국을 누비며 구한 ‘희귀 사진’이다.
사진 중엔 2019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조선의 ‘자전차(자전거) 왕’ 엄복동도 있다. 엄복동은 1928년 전주 덕진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도 우승했다. 이 원장은 “1915년 대전 이남에서 최초로 건립된 덕진운동장은 현재 전북대 박물관 자리에 있었다”며 “전국에서 서로 엄복동을 초청하려 했지만, 그럴 만한 시설도, 대회도 드물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가 사진전을 연 까닭은 뭘까. 이 원장은 “아태 마스터스대회는 스포츠로 밥을 먹는 ‘프로’ 대회가 아니라 ‘아마추어’ 대회”라며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국과 전북 스포츠의 위대성을 알리기 위해 전시회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