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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홀린 ‘가이타인’ 옛 동독 기술력 응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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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호 27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류이치 사카모토. [중앙포토]

류이치 사카모토. [중앙포토]

‘뮤지션이 존경하는 뮤지션’ 류이치 사카모토는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유치원 입학 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생 때부터 작곡을 했다. 당시 그의 집에 피아노가 없었는데,  갈증을 채워준 것은 음악을 사랑한 외삼촌이었다. 피아노는 물론 오디오와 빼곡한 레코드를 갖추고 있던 외삼촌의 집에서 그는 레코드를 원없이 들으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 위대한 아티스트의 시작이 외삼촌의 오디오였던 것이다.

탁월한 재능 덕에 도쿄 예술 대학 작곡과에 쉬이 입학했지만, 음대생 보다 자유분방한 미대생과 어울리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한다. 그는 사귀던 여자 친구와 대학교 3학년 때 아이를 갖게 되어 결혼한다. 부양가족이 생겼으니 건설 현장을 비롯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천직인 음악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피아노 연주 실력이 빼어난 그를 유명 뮤지션들이 앞다퉈 찾았다. 하루 12시간 이상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스튜디오 뮤지션 활동을 통해 그의 실력은 점점 소문나기 시작한다.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레코딩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나이아가라 레이블 소속 야마시타 타츠로와 가까워졌고, 그의 음반 및 라이브에 세션으로 참여한다.

모든 공정 가이타인 본사 내 해결

라이프치히 공연에 일반 공연용 스피커 대신 가이타인 스피커 8대 를 사용했다. [사진 Geithain]

라이프치히 공연에 일반 공연용 스피커 대신 가이타인 스피커 8대 를 사용했다. [사진 Geithain]

여기서 당시 일본 최고의 아티스트로 추앙받던 호소노 하루오미가 단번에 그의 빛나는 재능을 알아봤다. 호소노 하루오미는 평소 동경한 크라프트베르크 같은 일렉트로닉 밴드를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1978년 2월 류이치 사카모토와 타카하시 유키히로를 집으로 불러 YMO 결성을 제안했고, 같은 해 11월 첫 앨범 ‘Yellow Magic Orchestra’를 발표한다. 하지만 정작 류이치 사카모토는 심드렁했다. YMO보다 한 달 앞선 10월 첫 솔로 앨범 ‘Thousand Knives’를 발표했을 정도다.

그런데 1979년 8월, YMO는 LA에서 열린 튜브스 공연 오프닝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해외에서 호평받기 시작한다. 이를 기회로 10월부터 런던을 시작으로 한 월드 투어에 돌입했고, 콘서트는 흥행에 성공했다. 해외에서의 평가도 좋았지만, 더욱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모국 일본이었다. 투어 동안 미디어들이 그들의 소식을 앞다투어 실시간으로 중계했기 때문이다.

유럽, 북미에서의 YMO 인기는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맞물렸다. YMO의 이국적이면서도 세련된 일렉트로닉 뮤직은 전 세계로부터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했다. YMO의 글로벌 히트를 기반으로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레이 가와쿠보가 1981년 성공적으로 파리 컬렉션을 마무리하며 일본 패션을 전 세계에 전파한 게 대표적이다. 전자, 음악, 패션으로 이어지는 제2의 자포니즘(Japonism), 일본 경제와 문화 황금기의 태동이었다.

해외 투어 종료 후 귀국했을 때 YMO는 국민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 중 빼어난 음악성과 수려한 외모를 겸비한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팬덤이 집중됐다. 이 상황이 그리 마뜩치 않았던 그는 인기를 즐기기보다 오롯이 자신의 음악 세계에 몰입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좀처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그에게 배우로서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출연을 제의했고, 그는 음악감독 겸임을 조건으로 출연을 승낙한다. 결과적으로 영화와 영화음악 모두 빅히트를 기록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칸 출품을 계기로 베르나로도 베르톨루치 감독을 만난 그는 1987년 ‘마지막 황제’에 출연한다. 이번에도 배우였지만 촬영 종료 후 음악까지 맡아달라는 제작자의 요청을 받고 녹음까지 단 2주 만에 음악을 완성한다. 이렇게 제작한 음악은 그에게 아시아 최초의 아카데미 음악상, 골든글로브, 그래미상까지 안겼다.

일약 글로벌 스타가 된 그는 뉴욕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 음악감독 등 해외 작업을 늘렸고, 명반으로 평가받는 앨범을 매해 쏟아내는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했다. 2014년 암 투병 중에도 “부끄럽지 않은 작업물들을 좀 더 남기고 싶다”며 창작에의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음악 작업에 독일 가이타인(Geithain) 스피커만을 20년 넘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이타인은 1960년 엔지니어 요아힘 키슬러(Joachim Kiesler)가 구(舊) 동독 지역 가이타인에 창업한 기업이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후원으로 1930년대 독일 오디오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종전 후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는 과정에서 주요 오디오 산업이 모두 서독으로 이전해 버렸다. 오디오 산업의 위기를 직감한 동독 정부는 오디오 산업을 국유화해 집중 육성한다.

BTS 슈가와 함께 작업한 곡 유작돼

그의 2006년 공연에 쓰인 가이타인 RL901. [사진 Geithain]

그의 2006년 공연에 쓰인 가이타인 RL901. [사진 Geithain]

가이타인은 이런 배경에서 성장했다. 요아힘 키슬러는 초기 라디오, TV 수리에 머물렀지만 정부 지원에 힘입어 마이크, 앰프, 전자 오르간 개발로 사세를 확장하며 동독 정부 공인 오디오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동독 정부 지원 아래 자본주의 경쟁이 없는 환경에서 수십 년간 제품 개발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 가이타인 성공의 기반이었다고 술회했다.

1984년 요아힘 키슬러는 20여 년의 연구를 집대성한 역작, 액티브 스피커 RL900을 발표했다. RL900은 발표와 동시에 평단의 극찬을 받았고, RL900의 음향에 감동한 동독 정부는 국영 방송사의 메인 스피커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음악적 자부심인 드레스덴 챔퍼 오페라 하우스의 모니터 스피커로 채용하기에 이른다.

가이타인의 명성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지만, 냉전 시대였기에 가이타인은 동유럽 공산 국가 내에서만 유통됐다. 1989년 베를린 장벽 해체 이후 수많은 동독 기업이 사멸했다. 하지만 독보적 기술력을 지닌 가이타인은 생존해 요아힘 키슬러 소유의 회사가 되었다. 창업자의 장인 정신 아래 R&D와 생산의 모든 공정이 외주, 위탁 생산 없이 가이타인 본사 내에서 이뤄지고 있다.

가이타인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류이치 사카모토 덕분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독일 일렉트로닉 뮤지션 알바 노토와 2002년부터 작업했는데, 그와 함께 영화 ‘레버넌트’를 포함해 9장의 앨범을 냈다. 20년 이상 가이타인을 애용해온 알바 노토의 소개로 그가 가이타인을 접했으리라 추정된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유럽 콘서트에 가이타인 RL901 8대를 불여 공연용 스피커로 사용했을 정도로 가이타인을 애용했다. 그는 자신의 뉴욕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이타인 RL904을 고집했다. Async 앨범의 멀티채널 작업 시에도 아예 타 스피커를 고려하지 않고 RL904 3대를 추가로 설치할 정도였다. 지난 2017년 그의 ‘Async 설치음악전’을 보기 위해 도쿄 와타리움 미술관을 찾은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작업 환경을 고스란히 재현하기 위해 전시장 내 모든 스피커를 가이타인으로 설치한 치밀함 때문이었다.

가이타인이 류이치 사카모토가 사랑한 스피커라는 사실에 가장 뜨겁게 반응한 곳은 일본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NHK 방송국이 메인 모니터 스피커로 가이타인을 낙점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고, 수많은 아티스트와 레코딩 스튜디오가 가이타인을 사용 중이다. 뮤지션 토와 테이, 칸노 요코도 가이타인의 오랜 사용자다.

가이타인은 세계적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덜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류이치 사카모토의 팬이 많은 만큼, 그를 좇아 가이타인을 사용 중인 이들이 알고 보면 적지 않다. 뮤지션 이상순이 대표적인 가이타인 사용자다. ‘효리네 민박’ 등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가이타인이 종종 공개됐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고(故) 마영범 소장이 운영했던 ‘바 올댓재즈’의 메인 스피커도 가이타인 RL900이었다. 공간을 옹골차게 울려내던 RL900의 재즈 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오랜 투병 끝에 지난 3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독 한국과 가까웠다. 김덕수, 정재일 등 한국 뮤지션과 오랫동안 교류했고 2017년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감독을 맡기도 했다. 백남준, 이우환을 존경해 가까이 지냈고, 올해 1월 출시된 그의 앨범 ‘12’의 재킷 아트웍은 이우환이 맡았다. 지난해 BTS 멤버 슈가와 함께 작업한 곡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10대부터 그의 음악을 들어온 나도 그의 부고 소식에 먹먹한 며칠을 보냈다. 그는 마지막으로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문구를 남겼다. “레코드는 시간의 기록”이라고 했던 그의 이야기처럼, 레코드 연주 속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불멸로 남았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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