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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 이끈 ‘조슈 파이브’에 한·일 과거사가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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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호 25면

역사여행, 메이지유신 발원지 ‘하기’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에 위치한 ‘메이지 유신의 요람’ 쇼카손주쿠. 강혜란 기자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에 위치한 ‘메이지 유신의 요람’ 쇼카손주쿠. 강혜란 기자

흑백사진 속 다섯 젊은 남자는 누구인가. 일본 혼슈의 서쪽 끝자락 하기(萩)시를 걷다 보면 드는 의문이다. 웬만한 유적지 곳곳에서 나비넥타이 정장에 반듯하게 머릿결을 만진 다섯 청년을 볼 수 있다. 다소 긴장한 표정의 사진 속 주인공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유신을 전후해 활약했던 조슈번(長州藩·지금의 야마구치현) 출신의 청년 무사(사무라이)들이다. 사진은 그들이 1863년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을 어기고 영국 밀항 유학에 올랐을 때 찍은 것이다. 서구 열강의 눈부신 산업화를 목도하고 귀국해 일본 근대화의 주역으로 활약한 다섯 중에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있다.

밀항 당시 22세였던 그를 사진으로 만난 건 지난 5~7일 시모노세키와 하기, 후쿠오카를 찾았을 때다. 간몬(關門) 해협을 가로질러 후쿠오카현과 야마구치현을 잇는 길이 1068m의 간몬교를 건너면 혼슈와 규슈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야마구치현의 관문 시모노세키는 임진왜란 후 조선통신사가 16차례 들렀던 상륙지이고 이곳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의 하기는 ‘메이지 유신의 요람’ 아닌가. 한·일이 이제까지와 다른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서로 더 알아야 한다는 상념 속에 이곳들을 둘러봤다.

막부 쇄국 정책 어기고 영국 밀항 유학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슌판로(왼쪽)와 일·청강화기념관. 강혜란 기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슌판로(왼쪽)와 일·청강화기념관. 강혜란 기자

“저쪽 건물은 현재도 소(초등)학교로 운영되고 있고, 이 옛 건물은 막부 말기 박물관 및 하기 세계유산 홍보관으로 쓰입니다.”(안내원)

조슈번이 1718년 창설해 일본 3대 학교로 불린 메이린칸(明倫館). 1849년 현재 터로 옮겨온 이래로 지금까지 줄곧 교육기관으로서 역할하고 있다는 얘기다. 1·2층에 걸쳐 각종 근대 유물을 비치한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게 1층 복도 한쪽의 ‘조슈 파이브’ 포토존이다. 2006년 밀항 유학생 5인을 다룬 영화 ‘조슈 파이브’가 개봉하면서 붙은 별칭을 그대로 땄다.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을 실제 크기의 등신대 판넬로 뽑고 의자를 배치해 마치 아이돌 스타처럼 함께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만들었다. 훗날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외에 ‘외교의 아버지’ 이노우에 가오루(밀항 당시 27세), ‘조폐의 아버지’ 엔도 긴스케(27세), ‘철도의 아버지’ 이노우에 마사루(20세), ‘공학의 아버지’ 야마오 요조(26세)를 아우른다.

기껏해야 20대 하급 사무라이였던 이들이 어쩌다 막부의 서슬퍼런 쇄국령을 어기고 밀항 유학길에 올랐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메이린칸에서 멀지 않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가봐야 한다.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1830~1859)이 운영했던 사설학당이다. 그가 속한 조슈번은 도쿠가와 집권기 내내 변방의 설움 속에 막부 권력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다가 19세기 중반 기회를 잡았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 함대를 시작으로 열강의 무력 개항 요구가 거세지자 반(反)서양 정서가 반막부 운동으로 이어졌다. 봉건 질서의 중심이던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일왕)에게 권력을 되돌려주자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운동이 타올랐고 조슈번은 그 선봉에 섰다.

조선통신사 상륙지 기념비. 강혜란 기자

조선통신사 상륙지 기념비. 강혜란 기자

다만 요시다 쇼인은 양이(오랑캐를 배척함)를 위해서라도 서양을 잘 알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시모노세키항이 거듭 서양 함대의 포격에 박살나면서 그들의 선진 군사·산업의 위력을 절실히 깨쳤다. 요시다가 29세에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한 뒤에도 쇼카손주쿠는 50년가량 이어지며 신분·출신을 가리지 않고 ‘개혁파’를 길러냈다.

다다미 8장과 10장짜리 방 두개로 이뤄진 학당 안엔 주요 ‘지사’(존황양이 활동가를 부르는 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민간기병대를 창설해 막부와의 싸움(제2차 조슈 정벌)을 승리로 이끈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와 메이지 유신 3걸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 등이다(유신 3걸 중 나머지 둘은 사쓰마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특히 다카스기는 야마구치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이곳에서 세습정치를 해온 고(故) 아베 신조 총리와 그의 부친 아베 신타로의 신(晋)자가 신사쿠에서 따왔을 정도다. 이토 히로부미는 쇼카손주쿠 문하생 중 막내뻘이었다.

“(그들의) 번영한 모습을 보고 거의 망연자실해 양이 따위라고 하는 것은 일순간에 날아가고 말았다.” 스승 요시다의 처형 4년 뒤 영국행 밀항길에 나선 조슈 5인은 런던 항구에 내린 순간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바다엔 증기선이, 시내엔 고층 건물이 빼곡했고 교외로 연결되는 증기기관차가 칙칙폭폭 달렸다. 다섯 심장에 부국강병을 통해 조국을 일신하겠다는 야심이 끓어올랐을 것이다. 조슈번에 이어 영국에 유학생을 보낸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까지 앞장 서 막부 타도의 기세가 더해졌다. 도사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1836~1867)의 중재로 사쓰마번과 조슈번 사이에 삿초(薩長) 동맹이 맺어졌고, 이에 힘입어 1867년 역사적인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뤄졌다.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일왕에게 통치권을 반납한 사건이다. 이듬해인 1868년 왕정복고가 단행되면서 메이지유신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공습 운 좋게 비껴나 도시 윤곽 보존”

간몬교가 보이는 시모노세키의 미모스소 가와 공원에 조슈번 시절 일본 대포의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강혜란 기자

간몬교가 보이는 시모노세키의 미모스소 가와 공원에 조슈번 시절 일본 대포의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강혜란 기자

쇼카손주쿠 인근에 이토 히로부미가 자랐던 옛집과 말년에 지은 별처가 나란히 있다. 일종의 기념관이 된 별처 전시물엔 그가 조슈 파이브 외에도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의 일원이었음이 강조돼 있다. 1871년 메이지 일왕의 공경대신 이와쿠라 도모미를 단장으로 서양 12개국 시찰에 나선 사절단이다. 당시 사절단의 목적은 두가지, 개방·개혁의 메이지 신정부가 출범했음을 알리면서 그 전까지 각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해보려는 것과 선진국의 헌법과 인프라 체계를 연구해서 일본에 심으려는 것이었다. 약 1년8개월간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주축이 돼 1889년 일본제국헌법을 제정했다. 동아시아 첫 근대적 입헌 정부의 탄생이다.

메이린칸(明倫館)의 ‘조슈 파이브’ 포토존엔 관광객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의자가 비치돼 있다. 왼쪽부터 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강혜란 기자

메이린칸(明倫館)의 ‘조슈 파이브’ 포토존엔 관광객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의자가 비치돼 있다. 왼쪽부터 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강혜란 기자

1852년생인 메이지 일왕(재위 1867~1912)과 같은 해 태어난 고종(재위 1863~1907)은 비슷한 격변기를 살았다. 일본은 함포를 앞세운 서양 열강에 문호를 개방했던 굴욕을 그대로 응용해 운요호 사건(1875)에 이은 강화도조약(1876)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다. 이어 갑오농민전쟁(1894~95)을 빌미로 청나라와 맞붙어 승리를 거뒀다. 강화협상을 위해 당시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시모노세키까지 왔을 때 그와 마주 앉은 일본 측 전권대표가 이토다. 쇼카손주쿠의 배움에 바탕해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세계문물을 섭렵하고 돌아왔던 그는 53세의 관록 있는 정치가가 돼 중화 대국을 무릎 꿇렸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낸 일본은 이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을사늑약(1905)을 체결했고 5년 뒤 조선왕조는 오백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시모노세키의 조선통신사 상륙지에서 고개 들어 언덕을 보면 당시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슌판로가 보인다. 바로 옆엔 당시 회의 장소를 재현한 일·청강화기념관도 있다. 그러나 이곳엔 이후 제국주의 식민 침탈로 폭주한 역사는 글자 하나 기록돼 있지 않다. 하기의 산업유산들 역시 일본인에게 ‘자력 근대화’의 산물로 미화될 뿐, 침략전쟁으로 이어져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고통을 준 역사는 생략돼 있다. 쇼인이 씨를 뿌린 정한론(征韓論)에 대해서도 침묵하긴 마찬가지다.

하기 시립박물관을 안내한 직원은 “2차대전 공습을 운 좋게 비껴나 수백년 전 도시가 조성될 당시의 윤곽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자랑했다. 그 태평양전쟁이 어떻게 초래된 건지는 모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과거에만 매달려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과거를 깡그리 망각한다면 불행과 과오가 반복될 수 있다. 일본의 역사를 여행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과 나란히 이뤄질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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