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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년 대이은 ‘흙살림 농법’…70가지 채소 키워 ‘몸살림 밥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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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농장에서 적세엽겨자(레드프릴) 잎을 채취하는 류근모 회장과 영농팀장인 아들 병찬씨. [사진 이택희]

농장에서 적세엽겨자(레드프릴) 잎을 채취하는 류근모 회장과 영농팀장인 아들 병찬씨. [사진 이택희]

“내가 한 일이 열에 아홉은 실패했지만, 이 식당만큼은 보람 있고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올가메디’라는 작은 농업법인으로 전환해 여전히 유기농 농장에 매달려 사는 류근모(63) 회장의 회한과 자부심이 섞인 한마디다. 그는 생태순환농법을 실천하는 장안농장을 일궈 쌈채소를 중심으로 하는 유기농업으로 10년간(2009~2018년) 한 해 100억원 이상 매출을 유지하던 한국농업의 전설이고 신화였다. 농장은 창업 25년을 맞은 2020년 3월 파산선고를 받았다.

“우리 만큼 채식 잘 다루는 민족 없다”

뷔페 차림에서 담아온 쌈 채소에 밥과 반찬. 작은 그릇은 오른쪽부터 쌈장 샐러드, 장국 국수, 청국장찌개, 채소 수프. [사진 이택희]

뷔페 차림에서 담아온 쌈 채소에 밥과 반찬. 작은 그릇은 오른쪽부터 쌈장 샐러드, 장국 국수, 청국장찌개, 채소 수프. [사진 이택희]

그가 말한 식당은 ‘열 명의 농부’라는 채식뷔페다. 본디 이름은 ‘류근모와 열 명의 농부 채식당’. 2014년 5월 26일 개업할 무렵 농장사업은 절정이었다. 그렇게 잘나갈 때 채식 식당을 연다고 하자 아는 사람은 모두 말렸다. 사람들은 “외진 데다 들어가는 길도 좁고, 소주나 삼겹살도 안 팔고, 풀떼기 먹으러 그 외진 곳까지 누가 가겠냐”면서 “미친놈 아니냐”고 비웃었다.

그는 생각이 달랐다. 지역에서나 알아주는 식당에는 관심이 없었다. 교황, 영국 여왕, 미국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세계 최고의 채식 식당을 꿈꿨다. 근거 없는 발상이 아니었다. 그는 “인디언이 먹는 풀이 20가지 미만이라 하는데 우리 민족은 웬만한 풀을 다 먹는다”면서 “소나 염소가 안 먹는 것도 데치고 우려서 무쳐 먹을 정도로 채식을 잘 다루는 민족이 세계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서양에도 채식 인구가 느는 추세이니 한국 채식문화는 세계의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는 40년 전부터 인생의 마지막 사업이 식당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한다.

그런 자기암시 또는 일생의 꿈을 펼친 ‘자부심’을 만나러 지난달 26일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로 갔다. 10만1818㎡(3만800평) 드넓은 농장 초입, 항아리처럼 아늑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식당은 3번 국도에서 나가 논길 밭길 따라 1.4㎞를 들어가야 나온다.

이날 뷔페 차림은 24~25가지 쌈채소와 15가지 음식에 2가지 음료가 나왔다. 음식은 ①모둠 생채소(오이, 당근) ②배추김치 ③대궁까지 들어간 상추김치(8대조가 지은 『과채재배법(果菜栽培法)』에 나오는 음식) ④배추 초절이 ⑤쌈채소를 데쳐 무친 나물 ⑥쌈장 샐러드(2011년 농장 주최 제1회 된장찌개 및 쌈장 경연대회 1등 레시피) ⑦콩고기 채소볶음 ⑧콩고기 매운 채소볶음 ⑨베이비 채소와 쌈채소 샐러드(당근·흑임자 드레싱) ⑩괴산 불정 안병수 농부의 유기농 콩으로 오늘 만든 전통 두부와 양념간장 ⑪귤(매일 과일 한 가지) ⑫5분도 유기농 쌀 가마솥밥 ⑬채소 수프 ⑭직접 띄운 청국장찌개(때로 된장찌개나 된장국) ⑮우리밀로 뽑은 충주사과국수와 채소·다시마로 우린 맑은장국. 후식 음료로 ①당일 분쇄한 유기농 원두커피 ②보이차.

쌈채소는 저온 진열대에 24~24가지를 내놨다. 이름을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보통 이름을 아는 채소는 다 있다고 보면 된다. 농장에서 상시 재배하는 채소가 50여 가지, 4계절 합하면 70가지가 넘는다 한다. 생산물 안내 팸플릿에 나오는 유기농 채소·과일·곡물 등 작물 종류는 102가지다.

류 회장은 “식당 전체 재료의 70% 이상이 유기농이고, 음식은 하루 18가지 이내로 제한했다”며 “맛없는 거 섞어 30가지, 50가지 차리지 말고 제대로 된 18가지 이내로 하자고 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비건 식당은 일반식당처럼 재료를 조리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Make) 게 아니라 맛있게 만들어진(Made) 재료를 차려 낸다”며 본질적으로 개념이 다르다고 했다.

양지바른 산자락에 둔 항아리 300여 개에선 소금·간장·된장이 부피가 점점 줄면서 10년 넘게 익어가고 있다. [사진 이택희]

양지바른 산자락에 둔 항아리 300여 개에선 소금·간장·된장이 부피가 점점 줄면서 10년 넘게 익어가고 있다. [사진 이택희]

쌈이 맛있는 건 기본이겠지만, 밥과 국수장국 맛에도 내심 놀랐다.

쌈 맛이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선 5월은 나물의 계절이다. 산나물만이 아니라 채소도 자연스럽게 키우면 맛이 오를 시기다. 그보다 중요한 건 신선도다. 채소는 밭에서 뜯은 다음에도 생체활동을 계속한다. 오래 두면 쇤다. 생체활동의 에너지는 맛을 내는 영양분이다. 영양 공급이 끊겼는데 계속 소모하면 맛이 없어진다. 그래서 채소 맛은 싱싱함이 좌우한다. 농장 안에 있는 식당의 쌈채소는 아침에 수확해 점심에만 상에 낸다. 남으면 소나 닭에게 먹인다. 밭에서 식탁으로(Farm to Table), 그 말 그대로다.

핵심은 농법이다. 이곳은 172년 역사를 내세운다. 류 회장 8대조 류재근(柳在根)이 신해년(1851) 3월 17일 썼다고 표지에 기록한 『과채재배법』을 출발로 삼는다. 고서로는 특이하게 완성 날짜를 적어 놨다. 책 중간 한 페이지에 따로 적은 분자법(糞苴法)이 눈에 띈다. (※이때 苴는 거칠다는 ‘저’가 아니라 두엄을 뜻하는 ‘자’로 읽는다.) 인분부숙양화법(人糞腐熟釀化法)이라고 주석한 뒤 인분을 60일 삭히면 물처럼 맑은 색의 거름 숙분(熟糞)이 된다고 그 과정과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책에 기록한 농법의 철학은 사람이 먹고 남은 자투리와 배설물로 가축이나 작물을 키우고,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과 부산물(거름)로 사람과 가축이 먹거나 작물을 키우는 생산-소비의 사슬을 이어가는 자연순환이다. 이 방법은 요즘도 ‘흙살림 순환농법’ 같은 이름으로 권장되고 있다.

다시마·채수 쓴 국수장국도 감칠맛

사계절 내내 50여 가지 채소가 자라는 농장 채소밭. [사진 이택희]

사계절 내내 50여 가지 채소가 자라는 농장 채소밭. [사진 이택희]

류 회장은 선조의 정신을 되살려 농장과 식당에서 나오는 자투리 채소와 잔반을 소와 닭에게 먹이고, 배설물을 6개월 이상 삭혀 만든 퇴비를 밭에 뿌려 작물을 재배하는 생태순환 유기농을 실천하고 있다. 소와 닭을 키우는 건 퇴비 생산이 주목적이다. 그래서 역사가 172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채소는 화학비료나 양액(養液)으로 재배한 것보다 맛있고, 건강에 좋다.

밥은 유기농 인증 국내 1호 쌀인 전남 보성의 ‘강대인(2010년 작고) 생명의 쌀’ 현미와 5분 도미에 찹쌀 현미를 조금 섞어서 짓는다. 1㎏에 1만원 가까이 가는 귀한 쌀이다. 밥이 약간 되지만 밥알이 거칠거나 단단한 게 아니라 고슬고슬 졸깃하다. 쌈과 잘 맞는다. 류 회장은 “첫술에 손님이 울게 밥을 지어 달라고 주방에 주문했다”면서 “이렇게 맛있는 밥을 우리 부모님은 못 드시고 돌아가셨구나 하고 울컥할, 그런 밥을 말한 것”이라 했다. 진짜 그런 손님이 있었다 한다.

국수장국은 여러 가지 채소와 다시마로 만든 채수(菜水)라 하는데 깔끔한 감칠맛이 놀라웠다. 멸치나 북어, 아니면 ‘맛가루’가 많이 들어간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전혀 아니라고 한다.

류 회장은 “아무나 생각하지 않는 최후의 1%를 채우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며 “내가 봐도 내가 참 묘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열정적으로 새로운 꿈을 말했다.

“서울·부산·대구·제주에 하나씩 직영점을 꼭 할 거다. 그 정도 도시라면 이런 식당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개인사업으로 하면 집세 건지기도 어렵다. 후원하겠다는 기업이나 사람이 있을 거라는 꿈이 내게 있다. 마지막 소원이다. 자연에 가장 가까운 식사가 채식이다. 지속 가능한 식생활을 위해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그게 나라는 게 현실적으로는 슬프다.”

현재 농장은 아들 병찬(35) 씨와 함께 운영한다. 건국대 축산학과와 한국농수산대 채소학과(3년제)를 졸업한 병찬씨는 대표 생산물인 쌈채소를 총괄한다. 식당에 공급하고 정기구독 방식 온라인 판매도 한다. 월 5만원을 내면 6가지 이상의 유기농 채소를 1㎏씩 한 달에 2회 택배로 보내준다. 여기 채소는 냉장고에 2주 이상 두어도 무르지 않는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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