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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B·텐 포켓’ 신드롬…아이 고모·삼촌까지 지갑 팍팍 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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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호 12면

저출산의 역설, 고가 아동복 불티

지난 2월 서울의 한 백화점 안에 있는 아동복 매장. [연합뉴스]

지난 2월 서울의 한 백화점 안에 있는 아동복 매장. [연합뉴스]

수도권에서 23개월 여아를 키우고 있는 김모(34)씨는 최근 명품 아동복 구매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브랜드 상관없이 예쁜 옷을 입혔는데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다른 아이들이 대부분 명품 브랜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냥 하나 사서 입힐까 싶다가도 티 하나에 수십만 원, 겉옷은 수백만 원이라 ‘이걸 입히는 게 맞나’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비슷한 고민을 했던 이모(41)씨는 결국 지난해 겨울 5세 아이가 입을 ‘몽클레르(moncler)’ 패딩을 구매했다. 한 벌에 100만원이 훌쩍 넘을 정도로 고가지만 최근 사이즈가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인기다. 이씨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인데다 또래 아이들이 많이 입어 샀다”며 “조금이라도 오래 입히려고 큰 사이즈를 골라 소매를 한 단 접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적어지고 있는데 아동복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매년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며 지난해 0.78명까지 낮아졌다. 반면 국내 아동복 시장의 규모는 2020년 9120억원에서 2021년 1조 1247억원으로 23.3% 증가했다. 같은 기간 40조 3228억원에서 43조 5292억원으로 8% 성장한 전체 패션 시장보다 성장률이 3배 가까이 높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추정하는 2022년 아동복 시장 규모는 1조 2016억원에 달한다.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한 명의 자녀에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VIB(Very Important Baby)’ 트렌드를 지목했다. 이전보다 덜 낳고, 늦게 낳는 만큼 아이를 귀하게 키우는 분위기가 형성돼 명품·고가 아동복이 인기를 끈다는 것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100원 하는 옷이 10벌 팔렸다면 지금은 1000원 하는 옷이 5벌 팔리는 격”이라며 “아동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한 아이에 투자하는 비용은 커졌다”고 설명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한 아이를 위해 10명이 지갑을 연다는 ‘텐 포켓(10 Pocket)’ 현상도 지목됐다. 황진주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아이 한 명에게 부모는 물론 조부모·고모·이모·삼촌 등 친척과 지인까지 10여 명이 관심을 가진다”며 “경제력 있는 성인 여러 명의 투자가 집중돼 고가 아동 브랜드가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이전 세대보다 더 소비 지향적인 밀레니얼 세대 여러 명이 한 아이에게 소비하며 나타난 저출산의 역설”이라고 전했다.

백화점 3사의 아동 명품 매출도 증가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의 올해 1~4월 아동 명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8.5% 늘었다. 일반 아동 매장 매출 증가율(19.8%)보다 더 높다. 같은 기간 신세계백화점의 수입 아동 브랜드 매출도 전년 대비 28.7% 증가했다. 전체 아동 상품 매출은 20.1% 상승했다. 아동 명품 매출 증가율이 전체 아동 상품 매출 증가율보다 높다. 롯데백화점의 아동 명품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15% 늘었다.

명품 브랜드와 캐주얼 브랜드는 키즈 라인을 확대하며 VIB 트렌드를 저격하고 있다. 디올은 최근 신세계 강남점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 베이비 디올 매장을 열었다. 몽클레르 앙팡, 버버리 칠드런, 펜디 키즈, 지방시 키즈 등 명품 브랜드도 백화점에 아동 전용 매장을 냈다. 지난해 9월 롯데백화점 잠실점에 국내 최초로 연 나이키 키즈 매장은 한 달 만에 매출 4억3000만원을 기록했다.

기존 아동복 브랜드도 사이즈를 늘리거나 대상 연령대를 넓히는 추세다. 아가방앤컴퍼니가 운영하는 유아동복 브랜드 에뜨와는 올해부터 3세에서 5세까지 입을 수 있는 토들러 제품군을 선보였다. 신생아부터 만 2세 아동을 대상으로 제품을 출시하다 타깃 확장에 나선 것이다. 반대로 만 6세에서 13세 아동용 제품을 만들던 블랙야크 키즈는 지난해 처음으로 만 2~5세를 위한 토들러 라인(100~120 사이즈)를 출시했다.

반면 중저가 아동복 브랜드가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알로앤루, 포래즈, 알퐁소 등을 운영했던 제로투세븐은 지난해 8월 영유아 사업을 전면 철수했다. 코오롱FnC도 지난해 7월 아동복 브랜드 리틀클로젯을 접었다. 서용구 교수는 “아동 시장이 양극화되며 고가 브랜드나 친숙한 캐주얼 브랜드 아니면 초저가 상품만 살아남으며 매쓰마켓(Mass Market, 대량구매 시장)인 중저가 브랜드가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소비 지향적인 태도가 아이의 경제관념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과시적 소비는 자녀에게는 물론 가계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아이가 고가의 상품만 입고 사용하면 소비를 통제하는 능력을 배울 기회가 없다”며 “명품 옷만 입고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명품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없다면 좌절감을 느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이어서 “중국의 소황제 세대처럼 이기적으로 클 가능성도 있다”며 “텐 포켓 세대가 자라 주변 어른들의 재산을 당연히 자신의 몫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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