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러시아 'KGB자본주의'의 권력과 돈...영국 언론인이 파헤친 흑역사[BOOK]

중앙일보

입력

책표지

책표지

푸틴의 사람들

캐서린 벨턴 지음
박종서 옮김
열린책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황이 지지부진한데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지은이는 이 책에 그런 푸틴의 인맥과 이들이 벌여온 ‘흑역사’를 담았다. 무명의 푸틴이 옛 소련이 무너지면서 생긴 러시아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권력을 움켜쥐고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며 측근과 국민을 통제해왔는지 다룬다.

푸틴은 옛 소련 시절 모두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증오했던 권력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 ‘치노브니크(공직자)’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 사실은 현재의 크렘린을 이해하는 열쇠다. 실제로 푸틴 정권은 ‘실로비키(힘 있는 사람, 제복을 입은 사람)’로 불리는 전직 KGB 출신으로 이뤄진 ‘이너 서클’이 움직이는 것으로 관측된다. 권력과 돈이란 톱니바퀴로 이뤄진 이 거대 ‘패밀리’는 자국은 물론 수많은 러시아 부호가 이주한 영국 등 해외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8주년을 기념하는 승리의 날 군사 퍼레이드에서 연설하고 있다.[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8주년을 기념하는 승리의 날 군사 퍼레이드에서 연설하고 있다.[AP=연합뉴스]

푸틴의 눈밖에 나자 2011년 가족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몸을 피한 올리가르히(러시아 과두재벌) 세르게이 푸가체프의 증언은 구체적이다. 그는 푸틴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활약하고, 한때 ‘푸틴의 금고지기’로 불릴 정도로 이너 서클의 중요한 축이었다는 인물이다.

지은이가 푸가체프를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옛 소련이라는 배가 난파하기 직전 가장 먼저 낡은 공산주의라는 배를 버리고 자본주의라는 새 배로 갈아탄 집단은 체제 수호를 담당했던 KGB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소련 시절부터 범죄조직과 손잡고 석유‧귀금속‧생활용품을 독점하고 검은돈을 축적했다. 이를 통해 소련이 사라진 러시아라는 공간에서 권력 네트워크를 계속 유지했으며 돈으로 법률 등 서방 시스템을 한껏 활용하며 국내외에서 계속 활개쳐왔다. 지은이는 푸틴과 수하들이 만든 이런 체제를 ‘KGB 자본주의’로 부른다.

이렇게 형성된 푸틴의 이너 서클 인사들은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 소비 등에서 ‘모든 게 준비된 도시’로 통하는 런던을 선호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푸틴의 측근들은 런던에 고가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친척이나 내연녀를 뒀으며 주말마다 이 도시를 찾아 현금다발을 뿌렸다. 그들의 배우자는 런던의 유명한 펜트하우스에 거주했고, 아이들은 유명 사립학교에 다녔다. 런던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서방의 영향력에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던 러시아 ‘애국자’도 자신의 딸을 런던에 살게 했다. 영국의 수도가 ‘런던그라드’로 불리는 이유다.

런던그라드에는 또 다른 용도가 있다. 푸틴의 눈밖에 난 사람을 철저하게 몰락시키는 ‘잔혹극’ 연출이다. 실로비키들은 굳이 모스크바의 비공개 법정으로 끌고 오지 않아도 ‘배신자’를 이곳에서 괴롭히고 피를 말릴 수 있다. 2013년 런던 근교 별장 욕실에서 평소 쓰던 스카프가 목에 감긴 채 발견된 올리가르히 보리스 베레좁스키 사건에서도 의문의 ‘냄새’가 난다. 신원 미상의 지문이 발견됐지만 런던 경찰은 자살로 결론지었다.

푸가체프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푸틴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수십억 달러의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푸가체프가 러시아중앙은행의 자산 7억 달러를 빼돌렸다며 영국 법률회사를 내세워 런던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푸가체프는 소송에 더해 폭발물 등으로 신변 위협까지 받자, 공포의 ‘라스토츠카(봄을 알리는 첫 제비)’가 왔다고 여겼다. 그는 영국 법원이 자신을 러시아로 보낼까봐, 자국민을 러시아로 송환하지 않는 프랑스로 옮겨 국적을 얻고 철통 같은 경비시스템과 수많은 경호원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8주년을 기념하는 승리의 날 군사 퍼레이드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8주년을 기념하는 승리의 날 군사 퍼레이드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은이는 수많은 증언과 정황을 바탕으로, 푸틴과 그 수하들이 정부에서 얻은 지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경제를 통제하면서 사익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옛 소련의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부르주아적인 원칙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푸가체프는 이들을 두고 “‘호모 소비에티쿠스’와 ‘광포한 자본주의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종”이라고 표현한다.

푸틴 일파는 옛 소련 몰락 뒤 러시아가 겪은 1990년대의 혼란 속에서, 돈을 벌려고 국가를 위해 일을 하는 시대를 만든 셈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면에는 이처럼 전직 KGB 요원들이 세운 ‘국가 속의 은밀한 국가’와 그들의 검은 자금이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전에는 2020년 세계 5위의 경제력을 보유할 것으로 전망됐지만, 지금은 13위 수준이다. 익명의 전직 러시아 고위 공직자는 지은이에게 “KGB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라며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흑색 작전을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현재진행형 비극이다.

지은이는 그럼에도 러시아에선 목숨을 걸고 푸틴과 측근들의 비리를 추적하고 폭로하는 전문적인 탐사보도 기자들이 활약하고 있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