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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준봉의 시시각각

한국에서 책방을 낸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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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문화디렉터

신준봉 문화디렉터

가장 떠들썩한 서점 개업이다. 야당 지도부가 1일 알바를 자청하고, 전국에서 지지자들이 몰려든다. 열정페이, 책방 사업자 이중등록 논란이 이는 가운데 책방 주인(으로 얘기됐던) 전직 대통령은 민감한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300㎞ 남짓, 43평 크기의 작은 지역서점 평산책방에서 요즘 벌어지는 일들이다.

책 사랑하는 전 대통령의 서점업
정치적으로 변질, 순수성 의심돼
책 함께 읽기 순기능 가능할까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 사랑은 익히 알려진 터. 인터넷 검색창에 가령 ‘문재인 대통령 추천 도서’라고 처넣으면 교보문고나 예스24 같은 대형서점이 친절하게 해당 도서들을 모아놓은 화면으로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예스24의 ‘문재인 추천 책’은 빨치산 아버지의 평생을 회고한 정지아씨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포함해 160종이나 된다. 『아버지의…』는 지난해 10월 문 전 대통령이 트위터에, 그에 앞서 책이 출간된 직후인 지난해 9월 초순에는 유시민씨가 인터넷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추천한 책이다. 정지아씨는 평산책방이 문을 연 다음 날인 지난달 27일 첫 번째 북토크 작가로 초대돼 “제가 지금까지는 만 부 작가였는데, 문재인 대통령님 덕분에 25만 부 작가가 됐다”고 발언했다. 책 자체도 좋아서겠지만, 막강 인플루언서들이 공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내친김에 에피소드 하나 더. 진보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이시영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2014년 8월 19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은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은 김영오씨의 단식을 말리기 위해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김씨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광화문광장에서 37일째 단식 중이었다. “건강이 걱정된다. 내가 단식할 테니, 단식을 그만두라”며 문 의원도 단식에 나선 것이다. 문 의원의 단식 현장을 이시영 이사장이 찾았다. 작가회의도 옆에서 동조 단식하던 참이라 인사차 들른 것이다. 문 의원은 책을 읽고 있었다. 현재 재단법인 평산책방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이었다. 이시영 이사장이 장난스레 도발했다고 한다. “이 긴박한 시국에 그런 책이 읽히십니까?” 문 의원이 발끈하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이 책이 어때서 그러는데요! 재밌는데요!”

이렇게 ‘진심’이 들여다보이니 평산책방 홈페이지의 소개 글의 취지를 액면 그대로 믿고 싶어 진다. “방문객에게는 책방과 휴식공간” “책 친구들이나 독서동아리를 통해 좋은 책 함께 읽기와 저자와의 만남 같은 활동” “방문객이 늘어나면 (…) 마을 경제에 도움” 같은 것들 말이다.

안타깝지만 현재로서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지자 결집의 구심점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적으로 의도한 결과라면 충분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거라고 봐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순수해도 권력 부근 정치의 자장 안에서는 어떤 사태든 변질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정점에 서 봤으면서 그런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순진한 거다. 당장 출판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최악의 출판 위기, 어떻게든 책이 팔리면 좋다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직 대통령의 서점 개업은 성립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한 가지 더. 책을 사랑하는 일과 책방을 내는 일은 전혀 다른 것이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2020년 『동네책방 생존 탐구』라는 책을 냈다. 처음에는 ‘동네책방 전성기’를 쓸 요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생존 탐구’로 바꿔야 했다. 그만큼 동네책방이 살아남기 어려운 출판구조여서다. 길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배경에는 불평등한 ‘공급률’과 절름발이 ‘도서정가제’가 있다. 쉽게 말해 우리 출판·유통 현실은 ‘대형’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런데도 그런 현실에 눈감고 영향력을 활용해 책만 팔 텐가. 이런 비난이 가해질 수도 있다.

안도현 시인 아니 이사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준비한 게 많다. 기다려 달라”고 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