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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직격인터뷰

획일적 ‘플랜테이션’ 대학에선 거목이 클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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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일대 혁신’ 내걸고 취임 100일…유홍림 서울대 총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캠퍼스는 몰라보게 변했다. ‘샤’자 정문 밑을 지나던 차로는 옆으로 비켜났고, 교내는 새로 들어선 건물로 빽빽해졌다.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계단’은 그대로지만, 축제장으로 쓰였던 행정관 앞 잔디광장은 새로 들어선 지하 주차장과 캐스케이드(계단형 수경시설)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리 대학의 질적 변화는 이런 외양의 발전을 따라가고 있을까. 인공지능(AI), 4차 산업혁명, 융복합 같은 단어가 난무하는 지금, 우리 대학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가. 그 발걸음의 속도는 또 어떤가. 지난 2월 1일 4년의 임기를 시작한 유홍림 서울대 총장을 찾은 것은 이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집무실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규제와 칸막이로 다양성 잃어…생태계 숨쉬는 ‘자연림’ 돼야
1, 2학년 대상 융합형 교육하는 ‘학부대학’ 2025년 설립 준비
신설되는 첨단융합학부, 새로운 교육 모델의 실험장이 될 것

혁신 대학 특징은 다양성과 융합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생태계가 살아 숨 쉬는 자연림 같은 대학 환경에서 큰 인재가 자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생태계가 살아 숨 쉬는 자연림 같은 대학 환경에서 큰 인재가 자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취임 후 100일이 지났다. 취임사에서 ‘대전환 시대 서울대의 일대 혁신’을 내걸었는데.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앞으로 대학이 어떻게 가야 하나, 존재 이유는 뭔가, 서울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총장 출마 결심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10년 후 서울대가 지금 같아서는 안 된다는 젊은 교수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서울대는 이런저런 발전계획이 있었다. 1975년 종합화, 2011년 법인화 때도 그랬다. 작년에는 ‘중장기발전계획’도 발표됐다. 그러나 큰 틀의 변화를 체감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진짜 변화가 필요하다.”
가장 변하지 않은 게 무엇인가.
“관료제형 대학의 모습이다. 서울대가 국립대인 데다, 국가 주도의 대량 인력 공급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불가피한 측면은 있었다. 그러나 규제가 획일적으로 적용되다 보니 다양성을 잃었다. 농업으로 치면 단일 작물을 대량으로 경작하는 ‘플랜테이션’이다. 학생 및 교수로 서울대에서 40여년을 보냈는데, 규정집이 점점 두꺼워졌다. 규정은 기본적으로 불신의 산물이다. 지나치게 강조되면 유연성이나 탄력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대학 교육이 ‘플랜테이션 경작’을 닮았다는 진단이 인상적이다.
“미래에 필요한 지식과 인재의 형태는 과거와는 다르다. 엄청난 능력을 갖춘 개인(super-empowered individual)에 의해 세계가 바뀔 수 있는 시대다. 스티브 잡스가 좋은 예 아닌가.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네르바 대학, 애리조나 주립대 같은 세계적 혁신 대학의 목표는 그런 개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런 개인은 지금의 ‘플랜테이션’ 같은 대학에선 나올 수 없다.”
혁신적 대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자연림(natural forest) 같은 모습이다.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대학들은 다양성을 최대한 확보하고 있다. 그런 다양성을 이어주는 연결성이 또 다른 특징이다. 공간적 캠퍼스가 아니라 네트워크와 플랫폼이 요체다. 그 위에서 유연성, 자발성, 자생성 등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자연림 하면 약육강식에 대한 거부감이 앞서지만, 오해다. 모든 게 연결돼 결국 균형을 이루는 생태계가 자연이다. 경쟁도 물론 있지만, 경쟁과 함께 협업이 가능한 에코 시스템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대학이다.”

학문의 출발은 연결성에 대한 인식

지난 2월 8일 총장 취임식에서 유홍림 총장이 오세정 전임 총장(오른쪽)으로부터 서울대 상징 열쇠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8일 총장 취임식에서 유홍림 총장이 오세정 전임 총장(오른쪽)으로부터 서울대 상징 열쇠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유 총장은 총장 출마의 변으로 J.S.밀의 ‘자유론’을 인용한 바 있다. “인간은 틀에 맞춰 제작돼 주어진 작업을 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만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총장 출마하면서 학부대학 신설 구상을 밝혔는데.
“입학 후 1~2년이 가장 중요하다. 진로와 가치관이 결정되는 시기다. 학부대학은 1~2학년 학생에게 문제해결 능력, 소통 및 공감 능력, 비판적 사고력, 시민성 같은 공통 교육을 진행하는 과정이다. 지금도 교양과정이 있지만, 이 역시 분절적이고 플랜테이션적 학사과정이라 한계가 있다. 학생들은 거대한 우주로부터 내면의 사소한 감정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우고 싶어한다. ‘존재의 거대한 사슬’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 배우는 게 큰 대(大)자 쓰는 대학 아닐까. 철학자 칸트도 출발은 천체 물리학이었다. 최첨단 로보틱스, 하이테크 등이 인간의 행복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고민해야 한다. 이런 연결성에 대한 시선이 학문의 출발이라고 본다. 서울대 종합화(1975년) 50주년인 2025년에 맞춰서 학부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에 생기는 첨단융합학부, 기존의 자유전공학부와 기초교육원이 학부대학에 포함될 것이다.”

서울대는 최근 교육부와 협의를 거쳐 218명 규모의 첨단융합학부 신설을 확정했다. ▶디지털헬스케어 ▶차세대 지능형반도체 ▶지속가능기술 ▶혁신신약 ▶융합데이터과학 등 5개 전공 과정이다. 유 총장은 “내년부터 신입생을 뽑는 첨단융합학부를 새로운 교육 실험 모델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첨단융합학부는 기존 공과대학 교수진뿐 아니라 인문·사회대학 교수진도 참여시킨다는 구상이다.

“공간이 교육이다”는 말이 있다. ‘레지덴셜 칼리지(RC·기숙형 대학)’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서울대에서 ‘LnL’(Living & Learning)이라는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 미국 스탠퍼드 등 서양의 전통 명문 대학들은 애초부터 RC 형태지만, 우리는 아직 실험 단계다. 캠퍼스 내 기숙사(관악사) 한 동을 리모델링해서 다양한 학과 학생을 입주시켰다. 지난해 300명을 모집했는데, 경쟁률이 4대 1이 될 만큼 높았다. 장기적으로 기숙사를 학부대학 과정과 결합할 구상도 있다. 단과대 학생을 섞어서 입주시켜 융복합형 인재로 키우고 싶다. 모든 비(非)교과 프로그램은 학생들 스스로 개발하게 해 자연스럽게 시민성과 리더십 함양으로 연결할 생각이다. 이를 위해 기숙사 재건축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와 별도로 캠퍼스 내에 학내 구성원의 학습, 교류, 소통의 공간으로 ‘SNU Commons’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학 총장은 멀티형 리더십 요구돼

작년에 발표된 중장기발전계획에는 ‘서울대엔 2200명의 총장이 있다’는 표현이 있다. 혁신은 좋지만, 구성원의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게 총장 리더십의 핵심이다. 교수, 학과, 단과대 등 자율적인 주체가 워낙 많으니까. 서울대 총장은 ‘선출직’과 ‘임명직’이라는 상반된 성격이 있다. 이사회가 최종 결정을 하지만, 교수들은 자신들이 선출에 사실상 간여한다고 생각한다. 총장이 강한 장악력을 쥐어야 한다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맞선다. 결국 소통과 설득이 중요하다. 명분과 비전이 합의를 이끌 원동력이다. 지금의 대학 총장은 멀티태스킹(다중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세일즈를 해야 한다.”
서울대 교수진의 연구가 평균적으론 우수하지만, 아주 탁월한 실적(Only One)은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다.
“교육도 그렇지만, 연구도 ‘자연림’ 환경이 중요하다. 전임 교원을 학과부 소속으로 두는 학칙부터 바꿔야 한다. 전체 대학 소속도 있어야 하고, 단과대 소속도 있어야 한다. 소속을 유연화하면 융합·소통이 쉬워진다. 커뮤니티가 중요하다.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수상 소감에서 동료 교수에 대한 감사부터 표했다. 선진국 대학처럼 ‘브라운백 미팅’(샌드위치 등을 들며 하는 모임) 등을 통해 교수들끼리 교류하는 문화가 활성화해야 한다.”
제도혁신위원회가 신설됐는데.
“두 가지가 목표다. 규정집을 줄이는 것과 ERP(전사적 자원관리) 도입. 규제는 ‘포지티브 형’에서 ‘네거티브 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명시적 규제를 빼고는 기본적으로 모두 푼다는 뜻이다. ERP는 효율적인 행정지원 체계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야 관료제형 대학에서 플랫폼형 대학으로 갈 수 있다.”
입시제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나.
“대학별 특성화가 제대로 되려면 대학별로 입시 자율성이 커져야 한다. 서울대 입시 제도가 초중등 수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조심스럽긴 하나, 큰 방향은 자율 강화다. 앞으로 AI나 하이테크의 발전으로 ‘기초학력’의 개념도 달라질 것이다. 수학 문제 푸나 못 푸나가 기초학력의 기준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그 시구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나.
“이 시구는 1971년 종합캠퍼스(관악캠퍼스) 기공식에 부친 축시다. 다양성·유연성·연결성·포용성 같은 개념은 어쩌면 캠퍼스 종합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칸막이가 문제 된다. 그걸 넘어서는 것이 이 시구를 유효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본다.” 

◆유홍림 총장=1961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 럿거스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정운찬 전 총장에 이어 21년 만의 사회대 출신 총장. 포용력과 온화한 성품을 지닌 외유내강형 학자라는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