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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히틀러부터 네오나치까지…배타와 멸시의 광시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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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순수 혈통’ 아리안에 대한 환상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아리안이라는 이름은 약 3500년 전에 작성된 고대 인도 경전인 『아베스타』와 『리그베다』에 처음 등장한다. 아리안은 지금의 인도-이란 계통의 선조로, 그 이름은 귀하고 신실한 사람을 뜻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아리안족 하면 독일의 나치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처럼 히틀러는 독일인을 순수하고 우월한 아리안족의 후손이라 부르며 주변국을 침략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21세기 오늘에도 유럽 각국과 인도에서는 아리안의 후손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리안은 왜 인종차별과 나치의 상징이 됐을까. 고대 아리안을 둘러싸고 유럽과 인도에서 100년 넘게 벌어지는 역사전쟁을 들여다본다.

‘귀인’ 뜻하는 인도-이란계 선조
고대 유라시아 첨단문명 전파자

19세기 중반 이후 역사왜곡 시작
영국·독일 등 제국주의 상징물로

최근 서유럽 극우주의의 발원지
우크라전쟁에도 ‘나치문양’ 등장

영국의 인도 식민지 정당화 수단

나치 선전예술가인 아르노 브레커의 조각품 ‘당(Die Partei, The Party)’. 나치가 상정한 ‘우월한 아리안’을 형상화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나치 선전예술가인 아르노 브레커의 조각품 ‘당(Die Partei, The Party)’. 나치가 상정한 ‘우월한 아리안’을 형상화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아리안이라는 고대 사회의 호칭이 순수하고 우월한 백인을 가리키는 말로 둔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유럽에서부터였다. 가장 먼저 아리안을 꺼내 든 나라는 영국이었다.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인도의 카스트 계급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아리안을 끌어들였다. 고대부터 인도를 다스려온 상층부 귀족은 순수한 백인 아리안이었고, 이후 미천한 사람들과 피가 섞이면서 혈통이 오염됐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영국의 인도 지배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아리안족의 귀환이자 정당한 작업인 셈이 된다. 더욱이 영국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고대 아리안족의 후손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일종의 ‘명예 영국인’으로 편입하며 식민지배 이념으로 이용했다.

영국의 이 같은 지배 논리는 고고학 발굴로도 이어졌다. 20세기 초반부터 50년 넘게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모헨조-다로’의 도시 유적 발굴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무질서하게 놓인 인골 40여 구가 발견됐는데, 영국 고고학자 모티머 휠러는 이를 두고 인더스 문명이 아리안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히틀러가 내세운 ‘우월한 독일인’

나치 독일 치하의 유대인(왼쪽)은 외출 때 ‘다윗의 별’을 달고 다녀야 했다. 나치는 아리안만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대학살을 저질렀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나치 독일 치하의 유대인(왼쪽)은 외출 때 ‘다윗의 별’을 달고 다녀야 했다. 나치는 아리안만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대학살을 저질렀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고작 40여기의 인골만으로 침략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판단이다. 외부 침략이 아니어도 전염병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 고고학은 인더스 문명은 외부 침략이 아니라 기후변화로 강물이 바뀌면서 당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진 것으로 본다. 별다른 근거도 없는 아리안 침략설은 최근까지도 여러 역사책에 실릴 정도로 아리안족의 이미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현재 인도 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어두운 피부색의 드라비다인을 백인인 아리안이 선진 문명과 무기로 정벌했다는 해석이 더해지면서 아리안이라는 환상의 민족에 대한 오해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영국이 만든 아리안족 환상은 히틀러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대한 독일 민족을 내세우며 순수한 아리안을 강조했고, 그 유명한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를 상징으로 동원했다. 히틀러는 갈고리 모양의 이 십자가가 작열하는 태양 또는 힘차게 굴러가는 바퀴를 상징한다고 이해했다. 사실 구부러진 십자가 형태는 신석기시대 이래 여러 지역에서 두루 나타나는 문양이다.

20세기 초반 유럽이 상상하던 인도를 점령한 아리안의 모습. 『Hutchinson’s Story of the nations』에서.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20세기 초반 유럽이 상상하던 인도를 점령한 아리안의 모습. 『Hutchinson’s Story of the nations』에서.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히틀러가 하켄크로이츠를 선택하고 ‘아리안’을 내세운 것은 실제 인도의 아리안과는 관계없는 ‘우월한 유럽인’이라는 뜻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우수한 독일인이 다른 민족과 혼혈이 되면서 그 지위가 떨어졌다고 주장하며 지독한 인종 말살 정책을 합리화했다. 이어 소련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저열한 슬라브인’에게 빼앗긴 아리안족의 옛 고향을 찾는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나치는 왜곡된 역사의 합리화 작업에 나섰다. ‘순수한’ 아리안족을 찾는다며 티베트에 고고학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물론 티베트 주민들은 인도-유럽인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나치의 티베트 탐험대는 엉뚱하게도 티베트 불교사원에 있던 ‘만(卍)자’ 문양을 주목했다. ‘卍자’와 나치의 관련을 강조하며 티베트와 파미르고원 같은 지역에 아리안의 원래 고향이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 최근까지도 서양에서 티베트가 신비로운 명상이나 문화 또는 ‘인디애나 존스’ 같은 영화 소재로 등장하는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하지만 독일의 탐사 목적은 사실 티베트와 같은 아시아 지역에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사전 조사였다는 것도 뒤늦게 밝혀졌다. 히틀러는 인종청소와 함께 아리안의 옛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침략의 구실로 아리안설을 이용했을 뿐이다.

페르시아 국호가 이란이 된 이유

6000여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마라 문화 토기. 중앙에 스와스티카(꺾어진 십자가) 무늬가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6000여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마라 문화 토기. 중앙에 스와스티카(꺾어진 십자가) 무늬가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20세기 전반 서구는 가상의 민족 ‘아리안’을 내세우며 제국주의 강화에 나섰다. 그 영향은 근동 지역 페르시아에도 미쳤다. 근대화를 추진했던 페르시아의 왕 레자 샤는 1935년 국호 자체를 ‘아리아인의 나라’를 뜻하는 이란으로 바꾸었다. 그는 기원전 5세기경 다리우스 1세의 치적을 기록한 베히스툰 비문에서 ‘이란’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들어 이란은 아리안을 잇는 정통 후계라고 주장했다.

인도 또한 ‘아리안 원조’ 논쟁에 합류했다. 아리안족이 원래 인도 아대륙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인도인은 구석기시대부터 외부인과 섞이지 않은 ‘단일한 기원’이라는 학설마저 나오고 있다. 인도의 지리 조건이나 다양한 주민 구성을 무시한 이런 주장은 ‘위대한 인도’를 선전하려는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아리안을 내세우는 또 다른 세력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대표되는 슬라브인이다. 히틀러의 나치에 2000만 명이나 숨진 슬라브인의 역공이랄까. 나치가 그토록 추켜세운 아리안인이 유라시아 초원에서 기원했으니 히틀러가 찾아 헤매던 아리안의 후손은 바로 슬라브인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내세운다. 이른바 네오나치의 부활인 셈이다.

러시아-우크라 전쟁 속 아리안족

나치의 상징을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아조프부대의 엠블렘.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나치의 상징을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아조프부대의 엠블렘.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이 같은 사이비 역사는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정신적 공백 상태에 빠진 러시아 젊은이들을 파고들었고, 그 결과 타인종을 노골적으로 혐오하고 테러를 가하는 네오나치 세력이 출현하게 됐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아조프연대나 러시아 용병부대 루시치 같은 일부 부대에선 나치 문양을 공공연히 사용할 정도다.

러시아 용병부대 루시치의 나치를 본뜬 문양.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러시아 용병부대 루시치의 나치를 본뜬 문양.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서유럽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리안족에 대한 집착이 극우정당으로 은밀히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아리안을 내세우진 않지만 순수한 유럽인의 고향을 지키려면 타민족을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했다. 반이민정책을 내세우고 이슬람과 아시아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렇듯 구대륙의 절반 이상은 요즘 다시 아리안을 외치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잠시 가라앉았지만 코로나 이후에 다시 고개를 들까 우려된다. 지역 간 긴장이 높아지고 서로에 대한 혐오가 강해지면서 아리안을 내세운 갈등과 분쟁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고대 청동기술과 기마술 주인공

러시아의 유사역사잡지 ‘선조의 유산’. 아리안을 슬라브라고 주장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러시아의 유사역사잡지 ‘선조의 유산’. 아리안을 슬라브라고 주장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앙포토]

고대 세계사에서 아리안은 인도-유럽 계통 사람 중에서 여러 지역 간의 교류를 담당하고 문화를 발전시켰던 사람들을 통칭한다. 그 배경에는 약 4000년 전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발달한 기마술과 청동 제련기술이 있었다. 이 선진기술을 일으킨 사람들이 사방으로 확산하면서 서쪽으로는 유럽으로 가서 유럽인을 형성했고 남쪽으로는 인도·이란고원에 정착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 신기술이 특정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듯 유럽 각국과 인도가 아리안을 자기 민족만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실체도 없는 아리안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고 타민족을 탄압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뿐 아니라 고대문명을 극도로 왜곡하는 일이다.

고고학이 증명하듯 아리안은 지역과 집단을 초월하여 새로운 기술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사람들이었다. 강력한 전차와 철기로 유라시아 곳곳에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전파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리그베다』라는 위대한 문학도 창조했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와 전쟁의 위협이 높아지는 현재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세계는 지금 역사에서 진정 무엇을 배울 것인가.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