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약 50만 명을 사망하게 한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을 판매한 퍼듀파머의 사장이자 공동회장 리처드 새클러. 사진 프로퍼블리카 캡처
1990년대 말 개발한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으로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던 새클러 가(家). 옥시콘틴을 판매해 축적한 부로 전 세계 예술·교육·과학 분야 유수의 기관에 거액을 후원했던 이들의 이름이 곳곳에서 지워지고 있다. 문제는 옥시콘틴의 중독성. 옥시콘틴에 중독돼 약물 남용으로 수십만명이 사망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MET) 등이 한때 이들을 '큰 손' 기부자로 기렸으나, 이젠 앞다투어 거리두기 중이다. 16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영국 옥스퍼드대가 새클러가와의 관계를 끊고 학교 건물 등에서 이름을 삭제했다"고 보도했다.
1957년 유대인 출신의 삼형제 레이몬드·모티머·아서 새클러는 제약사 퍼듀파머를 인수해 신경안정제 등을 개발·판매했다. 90년대부터 퍼듀파머는 강력한 마약 성분인 오피오이드로 진통제 '옥시콘틴'을 개발했다. 큰 수술이나 암 환자의 통증을 경감시켜주겠다는 목적이었다.

2020년 퍼듀파머의 부사장을 지낸 케이트 새클러가 청문회에 나와 선서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99년 레이몬드의 아들 리처드 새클러(78)가 사장직에 오르면서, 옥시콘틴이 본격적으로 미 전역에서 팔렸다. 리처드는 신약 개발에 투입된 거액의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공격적인 판촉 정책을 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그는 먼저 식품의약국(FDA)에 중독성 등급을 낮춰달라고 로비했다. FDA 승인을 받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독성 실험도 이뤄지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의사가 더 자주, 더 많이 처방하도록 접대를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옥시콘틴 출시 이후 약 20년 동안 올린 수익은 350억 달러(46조 8300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옥시콘틴을 처방받은 환자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약물 오·남용 논란이 불거졌다. 리처드는 의혹을 덮기 위한 마케팅에 힘썼다. NYT는 "리처드가 회사 직원들에게 '옥시콘틴 중독은 마약 중독자 등 범죄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지, 약물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라'고 지시하는 e메일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강한 마약성분인 오피오이드로 만든 아편계 진통제 옥시콘틴. AP=연합뉴스
옥시콘틴 처방 뒤 사망한 환자 수가 수십만명에 달하면서 소송이 줄지어 제기됐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09~2019년 50만명 이상이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2020년에서야 회사가 고용량 투약 시 중독을 비롯한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인지했음에도 판매했다는 사실이 법정에서 인정됐다. 하지만 피해배상 소송 건수가 수천 건에 달하자 퍼듀는 법원에 파산신청을 했고, 2021년 회사와 새클러 가문이 총 45억 달러(6조 277억원) 규모의 합의금을 내는 조건으로 승인됐다.
퍼듀의 몰락 이후 새클러가로부터 거액을 후원받았던 기관들이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2021년 12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덴두르 신전 건물 등에서 새클러 이름을 삭제했다고 발표했다. 70년대 새클러삼형제가 350만 달러(46억 8000만원)를 기부하면서 이름을 새긴 건물이다. 이외에 뉴욕 구겐하임 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 대영박물관 등도 새클러의 이름을 지웠다.

영국 옥스포드대에 있는 새클러 도서관. 사진 옥스포드 홈페이지 캡처
옥스퍼드의 이번 결정은 다소 뒤늦은 행보라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 2월, FT는 옥스퍼드가 새클러가로부터 연구비 등을 지원받는 대가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버드·예일대 등 많은 명문대가새클러가의 후원금을 거절하는 등 선 긋기에 나섰던 것과 대비됐다. 당시 옥스퍼드는 "몇 달 안에 입장을 정리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