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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초라했던 러시아 전승절, 붉은광장에는 T-34 탱크 1대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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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철재 외교안보부장

이철재 외교안보부장

매년 5월 9일은 러시아 전승절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승리를 거둔 1945년 5월 9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러시아는 전승절에 열병식을 크게 열어 강대국의 위상을 자랑했다. 그런데 올해 전승절은 자랑감은커녕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전차는 T-34 1대만 등장했다.

러시아는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진격할 때 선봉을 섰던 T-34를 내세워 체면치레하려 했을 듯싶다. 하지만 ‘궁극의 전차’라고 자랑했던 T-14 아르마타를 선보인 2015년에 비하면 초라했다.

세계 2위 러시아 군사력 퇴락
권위주의 군대의 민낯 드러내

내부 반란 우려한 푸틴의 오판
군 세력 나눠 상호견제 끌어내

우크라 전쟁서 지휘체제 붕괴
한 지도자를 위한 군대의 모순

전승절에 맞춰 러시아는 1년 가까이 혈전을 벌였던 우크라이나의 바흐무트를 최종 점령하려는 공세를 벌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당했다. 빼앗은 땅을 다시 토해내는 것은 물론 우크라이나의 기세를 간신히 틀어막는 상황이다. 초라한 전승절 행사를 바흐무트 승전보로 분식하려다 손해만 본 셈이다.

독재국가와 권위주의의 병폐

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열병식 장면. 같은 날 모스크바에서도 T-34 1대만 참가했다. [AP=연합뉴스]

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열병식 장면. 같은 날 모스크바에서도 T-34 1대만 참가했다. [AP=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지난해 2월 전쟁이 금세 끝날 것이라 장담했던 대부분의 군사 전문가들은 이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쟁으로 굴복시킬 것이라 내다보진 않는다. 러시아는 기껏해야 ‘피로스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많은 대가를 치러 간신히 이기는 게 피로스의 승리다.

우크라이나가 잘 싸운 까닭이겠지만, 무엇보다 러시아가 못 싸운 탓이다. 냉전 때 미국과 함께 전 세계의 패권을 다퉜고, 지금도 세계 2위로 꼽히는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몰락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군의 민낯을 보여줬다. 무능한 지휘관, 훈련이 부족한 병사, 낡아빠진 전술, 스펙에 못 미치는 무기, 방산비리로 형편없는 보급 등 총체적 부실 말이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만의 병폐가 아니다. 독재국가와 권위주의 체제의 구조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요즘 러시아와 삼각연대를 강화하고 있는 북한과 중국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군사적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다.

민주국가와 독재국가가 싸우면 늘 민주국가가 이긴다는 뜻이 아니다. 군국주의를 내세우는 독재국가와 권위주의 체제의 군대는 겉보기와 달리 그리 강하지 않다는 얘기다.

러시아는 이번 전쟁에 러시아연방군(러시아군) 말고도 바그너 그룹이라는 민간군사기업(PMC·용병), 체첸 의용군, 도네츠크 인민 민병대와 루한스크 인민 민병대까지 투입했다. 단일 지휘관이 전투부대를 지휘해야 한다는 지휘통일의 원칙과는 정반대다.

독재국가나 권위주의 체제는 군을 여러 개로 갈라놓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군대를 국방군(Wehrmacht)과 무장친위대(Waffen SS)으로 나눴다. 현재 중국의 인민해방군과 인민무장경찰부대(무경), 이란의 이슬람공화국군과 이슬람혁명수비대 등 2개 이상 집단이 국가의 무력을 분점한 사례가 꽤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여려 군사세력이 상호 견제하길 바랐을 것으로 보인다. 독재자는 자신의 안위가 최고 관심사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보다 내부의 쿠데타를 더 무서워한다.

이번 전승절 열병식이 수도 모스크바에선 볼품없이 열렸지만 지방 도시에선 최신 전차인 T-90이 거리를 누볐다고 한다. 전쟁 때문에 전차가 모자라 T-34 1대만 달랑 내보낸 게 아닌 듯하다. 푸틴 대통령이 만일을 대비해 열병식 규모를 줄였다는 얘기가 떠돈다. 실제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1981년 10월 6일 열병식을 사열하던 중 갑자기 뛰어든 군인들에게 암살됐다.

푸틴 대통령은 2007~2012년 국방개혁으로 병력을 줄이면서 무기와 조직을 현대화했다. 이 과정에서 장교들을 대량으로 솎아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서서히 푸틴 대통령의 충복이 돼 갔다. 푸틴은 러시아군이 그래도 못 미더웠는지 2018년 정치장교 제도를 부활했다. 정치장교는 100명 이상의 모든 부대에서 부지휘관을 맡는다. 군의 사기를 올리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는 게 임무라고 하지만, 결국은 군을 감시하는 게 본업이다.

푸틴 대통령은 다양한 집단이 경쟁하면서 승기를 빨리 잡기를 원했을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충성 경쟁은커녕 내부 총질이었다. 바그너 그룹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안전 철수를 조건으로 우크라이나군에 러시아 정규군의 위치 정보를 준다고 제안했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러시아군과 바그너 그룹은 견원지간이다. 얼마 전 포탄 지원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전쟁 최고사령관 세 번이나 교체

또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우크라이나의 반격에 성공하자 전술적 결정까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선의 상황은 급변하는 데 푸틴 대통령까지 보고가 올라간 뒤 다시 명령을 받다가 벌써 전투가 끝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졸탄 바라니 미국 텍사스대 교수는 “푸틴은 전쟁 초기 러시아군이 고전했던 이유를 장군들이 자신에게 제대로 보고했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최고 사령관을 세 번이나 바꿨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러시아군 지휘부는 푸틴 대통령을 화나게 할 내용을 걸러 보고하게 된다.

민주국가인 한국은 러시아군의 난맥상을 남의 일처럼 지켜볼 수 있을까. 한국에선 정치적 고려에 따라 군 인사를 하는 폐해가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때는 심했다. 노무현 정부 때 육사 출신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고 여겼던 문재인 정부는 하위직까지 군 인사를 청와대가 좌지우지했다. 한국군이 휴전선 너머 북한군이 아닌 북한산 자락 청와대만 바라보는 군대가 됐다는 비판마저 나왔다.

지휘관의 앞길이 전문적 능력이 아니라 개인이나 정부에 대한 충성심에 달려선 안 된다. 그러한 군대는 결국 러시아군의 신세가 된다.

이철재 외교안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