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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만에 첫발 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아직도 밥그릇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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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김경희 경제부 기자

인천에 사는 60대 여성 A씨는 병원 진료를 받은 후 실손의료보험금을 청구할 때마다 영수증 등 서류를 떼서 왕복 40분 거리 우체국을 찾는다. 인터넷이나 모바일로도 접수할 수 있다지만 디지털기기에 영 익숙지 않아서다. 만약 병원 등 요양기관이 보험사에 전자문서 형식으로 보험금을 대신 청구해준다면 이런 번거로움은 사라진다. ‘전 국민 실손 비서’라고도 불리는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보험업법 개정안)이 지난 16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소비자 편익 증진을 위해 청구 간소화를 권고한 이후 14년간 공회전 하다 이제야 본궤도에 올랐다. 실손보험은 약 4000만 명이 가입한 ‘제2의 건강보험’이지만 복잡한 청구 절차 때문에 소액 청구는 쉽게 포기하는 등 불편이 쌓여 왔다.

한 시민단체가 지난 15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무상의료운동본부]

한 시민단체가 지난 15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무상의료운동본부]

어렵게 첫발을 뗐지만 업계에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반응도 나온다. 가장 큰 쟁점은 병원 등이 보험사에 청구 서류를 보낼 때 어떤 ‘전송대행기관’을 거치느냐인데, 이 부분을 법에 명시하지 않고 시행령에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미 전국 의료기관과 전산망을 구축한 보건복지부 산하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유력했지만 의료계가 반발하면서 사실상 좌초됐다. 심평원이 환자의 진료 정보를 축적해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게 반대 이유다. 법적으로 실손청구를 위한 목적 외에 진료 정보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못 박는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면서다.

그러자 올해 초 갑자기 대안으로 떠오른 제3의 기관이 보험개발원이다. 허창언 보험개발원장이 지난 2월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보험개발원은 그간 보험 관련 정보를 오·남용한 전례가 없다며 적합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의료계는 보험개발원 역시 공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탐탁지 않아 하지만 심평원보다는 낫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보험상품 개발이나 보험통계 업무 등을 해온 보험개발원이 심평원처럼 전국 의료기관과 전산망을 구축하려면 돈이 든다는 점이다. 보험업계에선 관련 비용이 800억원 수준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4년 만에 논의의 물꼬는 트였지만, 시행령이 개정될 때까지 진통은 계속될 전망이다. 비급여 과잉 진료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병원, 어떻게든 보험금 지급액을 깎는 게 최우선인 보험사가 존재하는 한 제도의 오·남용 논란은 사라지기 어렵다. 하지만 ‘밥그릇 싸움’을 멈추고 한발 떨어져서 보면 청구 간소화는 시대적 흐름이다. 소비자의 번거로움과 행정력 낭비를 줄이되, 부작용은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