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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재일이 소리내다

'이권 다툼'만 남은 간호법 논란…내 생명 살릴 의사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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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재일 정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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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와 소송 위험 등으로 의사들 사이에선 생명을 다루는 전공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과로와 소송 위험 등으로 의사들 사이에선 생명을 다루는 전공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간호법 제정안은 간호사의 지위에 관한 법이다. 의사로부터 간호사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간호조무사에게는 간호사의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법이다. 간호사의 인권, 처우 그런 명분으로 접근하지 말자. 이건 지위에 관한 법이고 간호사와 의사-간호조무사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과연 간호사의 지위 변동이 그렇게 시급한 일인가.

강력한 국가 통제와 환자 갑질 #소송 위험에 적극적 진료 기피 #의사와 환자 함께 보호해야

지금 의료시장은 급변하고 있다. 2020년 장기요양보험 급여자가 86만 명을 넘어섰고 건강보험 급여 지급액이 10조원에 육박했다. 매년 10% 이상 증가하고 있고 2030년이 되면 24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가 부담 20%를 합산하면 요양 시장은 2030년 29조원 규모가 된다. 간병인 시장도 마찬가지다. 2021년 7조6000억원 정도로 추산되고 증가율도 연 8% 이상이다. 사실상 재외동포(F4 비자)에만 개방돼 있는데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간병비 인플레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 하루 간병비는 12만~15만원이고 간병인 인력 송출 수수료는 10~25% 수준이다. 인력송출센터가 정착되고 25% 수수료가 고착되면 간병인 인력 송출의 매출만 2조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2030년이 되면 요양병원과 간병인 시장 규모는 45조원에 육박한다. 사교육 시장의 1.5 배 규모로 커진다는 얘기다. 요양 및 간병 시장은 향후 30년간 성장이 약속된 시장이다. 국가 예산의 블랙홀이 될 것이고 우리의 등골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의료 시장은 치료와 케어의 양대 축으로 분화 중이다. 간호법 제정안이 시행됐다면 간호사는 케어의 영역에서 의사와 사실상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게 이번 간호법 논란의 핵심이다. 문제는 인권이 아니다. 이권이요 권력이다.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지금 이것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라도 되는가?

현재 대한민국 의료의 가격은 철저히 국가 통제다. 정확히 필수 의료의 영역에서 말이다. 필수 의료 영역에서 이윤 추구가 통제되자 그 바깥으로 의사 인력이 이동했다. 성형과 미용, 그리고 실손보험의 영역인 비급여 항목이 급성장했다. 담론의 장에서 의사는 이과생의 블랙홀이자 대한민국 최고 기득권 세력이다. 그러나 그건 판타지다. 의사도 돈은 더 벌고 싶지만, 위험과 소송은 회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3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회관에서 열린 ‘소아청소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인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3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회관에서 열린 ‘소아청소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인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생명과 직결될수록 국가 통제력은 강했고 환자들의 ‘갑질’은 심했다. 의사들은 스스로 방어해야 했고 생명을 다루는 바이털과(科)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가 붕괴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인식 속에서 의사는 강자고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의 처우 개선을 주장하는 말은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피니언 리더도 약자 보호를 외치는 것이 처신에 유리하다. 오피니언 리더가 의사나 대기업 같은 강자를 옹호하면 어용 소리를 듣는다. 의사를 타자화한 정치 담론 속에 문제 해결을 위한 공론은 실종되고 계급 투쟁만 남았다.

당신이 외과 의사라 가정하자. 지금 수술하면 살릴 확률이 70%, 수술을 안 하면 사망 확률이 100%인 환자가 있다. 당신은 수술하겠는가? 당연히 수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수술하면 소송 확률이 30%, 수술 안 하면 소송 확률이 0%라면 당신은 수술하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의사들이 소극적 진료를 한다. 적극적 진료를 하다 실패하면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사가 보호받지 못하면 환자들은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 침묵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문제도 없는 비극은 이렇게 탄생한다. 수술하다 사망한 환자의 통계는 있다. 그렇다면 수술을 포기해서 사망한 환자의 통계는 있는가? 없다. 우리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힘차게 손가락질하고 문제 해결은 외면한다. 감정의 승리이자 이성의 패배다. 이게 포퓰리즘의 폐해다. 이쯤 되면 의사의 지위에 관한 공론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의사들의 면책과 의무와 경제적 보상 사이의 새로운 균형점을 논의하고 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필요한 건 위험 분산과 보상이다. 자동차 보험이 운전자와 피해자를 둘 다 보호하듯, 의료 현장에서 의사와 환자를 둘 다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의사들이 바이털, 내·외·산·소를 포기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안전과 보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과로와 소송당할 위험, 상대적 박탈감을 참아내야 하는 일상 앞에 생명을 살리는 숭고함이 설 자리는 없다. 더는 의사 사회에서 생명을 살리는 명의가 에이스가 아니다. 돈 잘 버는 의사가 동기 중 에이스다. 하얀거탑의 긍지는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바이털 의사를 한다는 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명감 하나로 해야 하는 일이 됐다.

계속 실천할 수 없는 윤리 의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건 위선이다. 공공이라는 이름의 완장에 선동당해 의료 시스템을 망가뜨렸다. 의사의 전문성과 병원에서 그들의 주도권을 부정하고 병원에서 다수의 논리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건 군대에서 계급장 떼자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시민들이 냉정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실력 있는 바이털 의사가 제자를 길러낼 수 없는 시대가 오기 전에 말이다. 의사의 멱살을 쉽게 잡을 수 있는 시대가 민주화 시대라는 착각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의사는 존중받아 마땅한 직업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 받은 사람들이며 1등의 자부심 하나로 사는 사람들이다. 평등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평범하게 만들면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나타나 나의 생명을 구해줄 비범한 사람들이 사라진다.

유재일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