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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조선 천문학서 영감”…구찌, 러브레터 2번 공들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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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경복궁의 역사성과 동시대적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은 구찌 의상을 소개하는 행사를 개최하고자 근정전 사용을 신청합니다.”

세계적인 명품 패션 브랜드 구찌는 지난 2월 문화재위원회의 문을 두드리며 이런 입장을 밝혔다. 근엄한 역사 공간인 경복궁 근정전에서 패션쇼를 열게 허가해달라는 내용의 신청서에 “경복궁은 과거와 현대의 교차점에서 미래를 이끄는 대표적 문화유산”이며 “경복궁이라는 공간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국보 223호인 근정전은 조선 시대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위 사진은 조선시대 별자리 지도인 ‘천상열차분야 지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위 사진은 조선시대 별자리 지도인 ‘천상열차분야 지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재위원회는 ‘발상의 전환’에 공감했고, 조선을 대표하는 경복궁이 16일 저녁 구찌의 런웨이로 변신했다. 근정전을 둘러싼 행각(궁궐 좌우에 지은 줄행랑) 주변이 무대가 됐다. 경복궁에서 패션쇼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시아에서 열리는 구찌의 첫 크루즈 패션쇼(휴양지 패션을 선보이는 쇼)이기도 하다.

구찌는 이날 전통과 현대를 오묘하게 뒤섞은 의상들을 선보였다. 한복 치마를 연상시키는 드레스와 한복 옷고름을 차용한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이 등장했다. 스쿠버 다이버용 슈트 등 스포츠웨어는 크루즈 컬렉션에 어울리는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냈다. 근정전 마당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조명으로 채워졌고 팔작지붕은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자랑했다.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구찌의 글로벌 회장 겸 CEO인 마르코 비차리는 이날 패션쇼에 앞서 보도자료를 내고 “구찌는 전 세계의 역사와 예술적 가치를 품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경의와 경배를 보여온 브랜드이고 경복궁은 과거를 기념하고 미래의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며 “세계적 건축물인 경복궁을 통해 한국 문화, 그리고 이를 가꿔온 한국인과 연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과거를 기념하고 미래의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일 수 있어 영광”이라고 밝혔다.

구찌는 그동안 이탈리아 피렌체의 피티 궁,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나 각국의 랜드마크 건축물에서 패션쇼를 선보여 왔다. 지난해 5월에는 이탈리아 아풀리아 지역의 유적 카스텔 델 몬테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공개했다. 카스텔 델 몬테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성(古城)이다.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구찌는 지난해 8월에도 경복궁에 ‘러브레터’를 보낸 바 있다. ‘조선의 천문학’이라는 테마를 제시했다. 지난해 제7차 문화재위원회 궁능문화재분과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구찌는 “경복궁과 조선의 천문학에 영감을 받은 의상을 소개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우주를 주제로 한 ‘구찌 코스모고니’ 컬렉션을 선보일 이상적인 장소로 경복궁을 꼽은 것이다.

고전 천문학 전문가에게 자문하는 등 역사 고증에 공을 들였고, 태조 4년 제작된 별자리 지도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활용해 무대를 꾸미겠다는 계획도 제출했다.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행사의 상업성을 줄이고 궁의 문화재적 가치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조건으로 구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16일 서울 경복궁에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 구찌는 한복 옷고름을 닮은 리본 디자인의 실크 밴드 등을 선보였다. [사진 공동취재단]

하지만 지난해 8월 한 패션 잡지가 청와대에서 화보 촬영을 한 것을 계기로 청와대 활용 방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자 경복궁으로 불똥이 튀었다. 문화유산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커지자 ‘구찌 코스모고니 패션쇼 인 서울 경복궁’을 잠정 취소했다. 이후 문화재청과 다시 협의해 11월 쇼를 그대로 열겠다고 했지만 이태원에서 대규모 참사가 발생하면서 행사를 다시 취소했고, 이번에 패션쇼가 열린 것이다.

구찌는 이번 패션쇼 성사를 위해 세심하게 신경 쓴 모양새다. 앞으로 3년간 경복궁의 보존 관리와 활용 사업을 후원하기로 했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경복궁은 조선 최고의 법궁이자 궁중 예술, 건축뿐 아니라 한글 창제와 천문학 등의 발전을 이룬 문화와 과학의 중심지”라며 “구찌와의 조우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경복궁의 진정한 매력을 전 세계인들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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