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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카드 할인'에 전국 발칵…고물가에 탈원전, 독일 심상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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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해 4월 독일 베를린의 한 쇼핑몰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4월 독일 베를린의 한 쇼핑몰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에 경기침체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우고 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발 에너지 위기를 힘겹게 버티고 올해 경기 회복을 노렸지만, 생산 지표가 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고꾸라지며 경제 성장에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 8일(현지시간) 독일 연방통계청이 발표한 3월 산업생산은 전달보다 3.4% 줄었다. 지난해 5월(-3.7%) 이후 12개월 만의 최대 감소폭이고, 전문가들의 시장 예상치(-1.3%)도 훌쩍 뛰어넘었다. 독일 경제부는 “지난 1월(3.7%)과 2월(2.1%) 수치와 비교하면 예상외의 급격한 감소”라고 밝혔다.

네덜란드 투자은행 ING는 독일의 산업생산 지표를 보고 “달걀이 부화하기 전에 닭의 수를 세지 말라”는 평가를 내렸다. 한국으로 치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뜻의 미국 속담을 들먹이면서 독일 경제가 올해 점진적으로 회복할 거란 기대가 ‘섣부른 낙관론’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경제성장률 전망도 좋지 않다. 오는 25일 발표될 독일의 1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수정치)이 지난해 4분기(-0.5%)에 이어 마이너스를 나타낼 가능성이 제기된다. 카르스텐 브제스키 ING 이코노미스트는 “산업생산 감소로 지난 4월 말 발표된 예비치(0%)보다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두 분기 연속 역성장하면 독일은 기술적 경기침체(불황)”라고 전했다.

독일 경제 둔화의 주된 원인은 고물가다. 지난달 독일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7.2%다. 러시아발 에너지 쇼크로 급등했던 지난해 하반기보다는 낮지만, 2020년 0.5%대와 비교하면 여전히 높다. 독일 코메르츠방크의 랄프 솔빈 애널리스트는 “지난 겨울엔 침체를 가까스로 면했지만, 고물가가 공산품(자동차, 기계)에 대한 수요를 짓누르며 침체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1일 판매를 시작한 독일의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권 '도이칠란트 티켓'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일 판매를 시작한 독일의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권 '도이칠란트 티켓' 로이터=연합뉴스

오죽하면 이달 초엔 49유로(약 7만원)짜리 대중교통 정액권 ‘도이칠란트 티켓’을 사느라 독일 철도(DB) 티켓 판매 웹사이트가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판매 첫날에만 300만장 이상 팔렸다. 이 티켓은 표 한 장으로 독일 전국의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데 각 주에서만 사용 가능한 기존 대중교통 정액권(평균 72유로)보다 30% 이상 싸다. 로이터통신은 “전문가들은 도이칠란트 티켓이 독일의 물가 상승률을 낮추는데 기여할 거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지난 1일 독일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의 베를린 교통공사 고객센터 앞에 고객 수백명이 도이칠란트 티켓을 사려고 줄 서 있다. 지하철역 내부에 있는 고객센터에서 시작된 줄은 지상으로 올라와서도 수백미터 이어졌다. 연합뉴스

지난 1일 독일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의 베를린 교통공사 고객센터 앞에 고객 수백명이 도이칠란트 티켓을 사려고 줄 서 있다. 지하철역 내부에 있는 고객센터에서 시작된 줄은 지상으로 올라와서도 수백미터 이어졌다. 연합뉴스

문제는 독일 경제의 흔들림이 일시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 산업의 심장 ‘제조업’에 닥친 구조적 위기 때문이다. ING는 “우크라이나 전쟁, 인구 변화와 에너지 전환은 향후 몇 년간 독일 경제에 구조적 부담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여전한 에너지 쇼크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장관이 지난달 26일 올해 독일의 경제성장 전망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장관이 지난달 26일 올해 독일의 경제성장 전망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독일은 에너지 집약적 산업에서 주로 돈을 번다. 지난 2020년 기준 독일 제조업에서 에너지 소비 비중이 큰 부문이 화학(29.3%), 금속(21.9%), 정유(10%) 등이었다. 독일 도이체벨레(DW)는 “에너지 가격에 영향을 많이 받는 이들 부문이 독일의 수출 주력산업”이라고 지적한다. 에너지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3월 독일의 평균도매전기요금도 메가와트시(㎿h)당 102.4유로로 2020년과 비교하면 3배 이상 높다. 지난해는 비축 가스, 정부 보조금 등으로 버텼지만, 올해는 전기·가스비 부담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의 엑소더스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가스공급이 수요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 공장을 닫아야 한다”고 한 세계 최대 화학기업 독일 바스프의 경고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기타 고피나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는 “제조업 비중이 높은 독일엔 지난해보다 2023년 겨울이 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고심이 큰 독일 정부는 파격적 보조금 혜택까지 생각 중이다. 지난 5일 녹색당 출신의 로베르트 하베크 경제장관은 에너지 구조 전환이 완성될 2030년까지 에너지집약 산업에 전기요금을 보조하자고 제안했다. 전기 도매가격이 킬로와트시(㎾h)당 0.06유로를 초과하면 기업 전력 소비량의 80%에 해당하는 요금을 지원해주자는 것이 골자다.

탈원전에 줄어든 에너지 선택지

지난달 10일 독일 서부 엠즐란트에 있는 원전의 모습. 최근 가동을 중단한 독일 마지막 원전 3기 중 하나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10일 독일 서부 엠즐란트에 있는 원전의 모습. 최근 가동을 중단한 독일 마지막 원전 3기 중 하나다. AFP=연합뉴스

지난 4월 원전 3기의 가동을 중단하며 독일이 탈원전을 완성한 것도 에너지 선택에 부담을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AFP통신은 “독일 정부는 탈원전으로 부족해진 전력 생산을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려 충당할 계획이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고 전망했다. 독일 에너지수자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 전력 생산에서 재생에너지 비율은 44.6%이지만, 날씨에 따른 발전 능력 편차 등을 생각하면 재생에너지만으로 안정적 전력을 공급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당분간 해외에서 들여오는 가스·석탄·원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은 탈원전을 주장하면서 프랑스·스위스 등 원전이 주 전력원인 국가에서 전기를 수입해 쓰고 있다.

제조업 강국에 닥친 인재 부족

지난 8일 독일 아우스부르크의 한 제조업 공장에서 숙련 노동자가 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8일 독일 아우스부르크의 한 제조업 공장에서 숙련 노동자가 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고급 엔지니어와 숙련 노동자 부족도 위기 요인 중 하나다. 독일경제연구소(IW)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약 32만명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관련 전문인력이 부족했다. 독일 자동차 산업협회(VDA)도 업체 4분의 3이 인력 부족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DW는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를 앞둔 가운데 후속 세대엔 관련 분야 전공자가 적다”며 “독일 제조업의 품질 저하가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이성봉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독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공학·제조업보다 IT·금융 등 부가가치가 높은 곳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다”며 “마이스터(기술직업과정)에 대한 선호도 줄어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독일 정부는 “2035년 700만명의 노동자가 부족해질 것”이라며 최근 유럽연합(EU) 회원국이 아닌 국가에서 손쉽게 넘어올 수 있게 하는 ‘이민 촉진 개혁안’ 초안을 공개했다. 그러나 DW는 “비독일어 구사자에 친화적이지 않은 업무 환경이 더 문제”라고 꼬집었다.

다만 독일 경제 위기는 향후 상황에 따라 극복 가능할 것이란 평가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료되고 독일이 추진 중인 에너지 공급처 다변화가 성과를 거둘 경우 안정적 가스 공급이 이뤄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독일은 에너지 집약적 대량생산에서 고도 연구개발(R&D) 산업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며 산업 경쟁력 유지에 나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성봉 교수는 “독일 위기는 제조업이 중심인 한국에도 벌어질 수 있다”며 “장기적 관점에서 에너지와 산업 구조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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