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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 덩어리 옆 돌아가는 기계…'탈 탈원전' 1년, 봄이 찾아왔다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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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0일 경남 창원의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내부에 쌓인 납품용 제품들. 한산했던 지난해와 달리 직원들도 기계 등을 살피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종훈 기자

10일 경남 창원의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내부에 쌓인 납품용 제품들. 한산했던 지난해와 달리 직원들도 기계 등을 살피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종훈 기자

10일 경남 창원 외곽의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공장에 들어서자 기계가 돌아가는 커다란 소음이 먼저 반겼다. 기계 20대 중 3대를 빼고 모두 가동 중이었다. 직원 4명이 한빛·한울 원전 교체용 부품 가공 등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공장 내부도 납품을 기다리는 제품들로 가득 찼다.

여느 공장처럼 활기가 넘치는 이곳이지만, 1년 전 풍경은 사실상 '개점휴업'이었다. 두산에너빌리티 협력업체인 영진테크윈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속에 일감이 뚝 끊겼다. 지난해 6월 당시 공장 기계 19대 중 16대는 멈추거나 공회전만 했다. 기계가 몇 년씩 놀다 보니 일부는 붉은 녹이 슬어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직원들은 절반씩 돌아가며 쉬었다.

이 회사 강성현 대표는 "지난해 10%도 안 되던 공장 가동률이 최근 80~90%로 뛰었다"면서 "발주 품목이 작년엔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신고리·신한울 등으로 많이 받아놨다. 잔업도 하루 2시간 이상씩 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아직 자금 형편은 녹록지 않다. 매출이 회복되고 있지만, 예년 수준에 한참 못 미쳐서다. 빚도 원금은커녕 월 2000만원에 달하는 이자 갚기도 팍팍하다. 하지만 내년 이후에도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 연말 이후 녹슨 기계 두 대를 새로 바꿨다. 그중 하나는 힘들었던 시절과 작별하듯 고철로 팔기 위해 공장 밖 마당에 내놨다.

강 대표는 "직원들이 나와도 일이 없으니 눈치를 봤는데, 지금은 일거리가 있으니 서로 얼굴 마주쳐도 좋아한다"면서 "회사 신경이 덜 쓰이니 요즘 잠도 더 잘 오는 편"이라고 미소 지었다.

1년 전 원전 뿌리기업은...

지난해 6월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공장 내부 기계에 먼지와 함께 녹이 슬어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해 6월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공장 내부 기계에 먼지와 함께 녹이 슬어 있다. 송봉근 기자

10일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공장 내부에 놓인 기계. 일감이 늘어나자 새로 투자하는 차원에서 지난해 붉은 녹이 슬어있던 기계를 바꿨다. 정종훈 기자

10일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공장 내부에 놓인 기계. 일감이 늘어나자 새로 투자하는 차원에서 지난해 붉은 녹이 슬어있던 기계를 바꿨다. 정종훈 기자

탈원전 터널에서 벗어난 수백개 원전 뿌리기업이 기지개를 켠다. '탈(脫) 탈원전'을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째인 10일, 경남 창원·김해의 원전 뿌리기업 4곳을 찾았다. 원전 생태계 최전선에 있는 이들 업체는 일감에 따라 제작 시기가 달라 완전 정상화까진 시간이 남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온기는 피부로 느끼고 있다.

삼홍기계의 김승원 사장은 회사 옆에 붙어있는 사내 식당을 가리켰다. 그는 "불과 1~2년 전만 해도 회사 문을 닫을까도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요즘은 사내 식당만 보면 분위기가 바뀐 걸 안다. 탈원전 때는 휑했는데 지금은 점심시간에 꽉 찬다"고 말했다.

1월 초 공장 절반 이상이 멈춰있던 성산툴스의 이인수 대표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4개월 전보다 공장은 더 많이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신한울 3·4호기용 제품을 설계 중이라는 그는 "내년부터 제품 전시회도 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5일 경남 창원시 두산에너빌리티에서 열린 '신한울 3·4 주기기 제작 착수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뉴스1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5일 경남 창원시 두산에너빌리티에서 열린 '신한울 3·4 주기기 제작 착수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뉴스1

'4조9000억원 일감' 신한울 3·4호기, 원전 생태계 복원 신호탄

원전 생태계 복원의 신호탄은 내년부터 공사가 본격 재개되는 신한울 3·4호기다. 3호기는 2032년, 4호기는 2033년 완공 목표인데 10년간 2조9000억원 규모의 주기기 일감이 공급될 예정이다. 특히 한국수력원자력은 초기 3년 동안 절반 가까운 1조4000억원을 집행키로 했다. 이번 달부터는 2조원 규모의 보조기기 발주도 시작된다. 산업통상자원부·한수원 등은 2000억원 규모의 특별 금융 프로그램도 추가 시행한다. 김승원 사장은 "신한울 3·4호기는 중소기업들에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안정적 일감을 줬다는 것, 그리고 원전 사업을 계속해도 되겠다는 믿음을 준 것"이라고 말했다.

부활의 몸짓은 에너지 정책과도 직결된다. 기저 전력원인 원전의 중요성은 점점 커진다. 전체 발전량 대비 비중이 2018년 23.4%에서 2036년 34.6%로 올라갈 예정(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 전기요금 인상 속에 화력 발전을 대체하면서 원전 가동률도 2021년 74.5%에서 지난해 81.6%로 높아졌다. 체코·폴란드 등 해외에서의 원전 수주전도 진행형이다.

하지만 안전 등이 까다로운 원전 특성상 부품 업체 하나라도 사라지면 전체 공정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경영상 어려움에 이미 여러 업체가 문을 닫았다. 원전 산업 경쟁력을 지키려면 그동안 흔들린 '실핏줄' 같은 공급망을 추스르는 게 필수다. 협력업체들도 그 중요성을 알기에 5년 넘는 한파를 버텼다고 했다. 김곤재 세라정공 대표는 "원전은 볼트 하나로도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문 닫으면 이 일을 맡을 곳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10일 경남 창원의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강성현 대표가 납품할 제품들 옆에 선 모습. 기계를 거의 놀렸던 1년 전과 달리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면서 제품도 많이 제작하고 있다. 정종훈 기자

10일 경남 창원의 원전 뿌리기업 영진테크윈 강성현 대표가 납품할 제품들 옆에 선 모습. 기계를 거의 놀렸던 1년 전과 달리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면서 제품도 많이 제작하고 있다. 정종훈 기자

희망 속 "투자·인력·일감 문제 해소돼야" 목소리도

희망이 커졌다지만 이들 업체 한쪽엔 그늘도 남아있다. 신한울 3·4호기 이후엔 추가 원전 건설 등의 일감이 보장되지 않았다. 향후 원전 정책이 바뀌면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여전하다. 일할 사람 키우는데 5년 가까이 걸리는 업종 특성상 힘들어도 고용은 최대한 유지했지만, 신규 직원 채용은 '하늘의 별 따기'다. 지방 소재·중소기업 등의 한계가 뚜렷해서다.

강성현 대표는 "연초부터 구인 공고를 내놨는데 호응이 없다. 원전은 공정 특성상 자동화도 안 되는데, 이대로면 일감이 더 들어와도 사람 없어서 공장을 못 돌릴 수 있다"고 했다. 이인수 대표는 "일거리가 많아지면 사람을 더 뽑아야 하는데 4~5년 전 단가로는 30% 오른 인건비를 맞추지도 못한다. 일이 있어도, 없어도 걱정"이라면서 "신한울 덕분에 3~4년은 괜찮겠지만, 체코 수출 등이 잘 돼야 안정적인 일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일 경남 김해의 원전 뿌리기업 세라정공 공장 내에 놓인 SMR용 장비. 정종훈 기자

10일 경남 김해의 원전 뿌리기업 세라정공 공장 내에 놓인 SMR용 장비. 정종훈 기자

고사 직전에 몰려 생존에 급급했던 만큼 SMR(소형모듈원자로) 같은 '미래 먹거리' 경쟁력을 빠르게 갖추는 것도 발등의 불이다. 당장 숨 돌릴 소액·신용대출 등은 그나마 정부 등의 지원으로 풀렸지만, 신규 투자를 위한 지자체·금융권 등의 대출은 여전히 높은 벽이다.

김곤재 대표는 미래를 위한 투자가 각종 걸림돌에 막혀 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지난해까진 먹고 사는 게 일이었는데, 이젠 투자 여부가 중요해졌다. 신규 기기 도입이 핵심인데 (투자 보조금 등) 자금 지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도 모두 투자금을 지원받으려면 30명, 150명씩 신규 고용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뽑으려 해도 사람이 오지도 않는다. 매출액에 따라 대출 내준다는 것도 문제"라고 강조했다. 글자로 빼곡한 종이를 내밀면서 "하도 답답해서 윤 대통령에게 편지라도 보내려고 한다"라고도 했다.

김승원 사장도 "경영 상태가 안 좋으니 대출보다는 외부 투자 유치 중심으로 노력하고 있다"면서 신규 투자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그는 "탈원전으로 매출이 없는데도 은행들은 실적·신용도를 따진다. 확실한 투자 계획이 있는 업체엔 정부가 나서서 장기 저리 대출 등 지원을 해줬으면 한다. 어느 정도만 자금이 들어와도 기업 입장에선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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