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극단의 여야, 아마추어 복지부…또 '의료정치' 민낯만 드러났다 [VIEW]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대한간호협회와 간호법제정추진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것과 관련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대한간호협회와 간호법제정추진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것과 관련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간호법 갈등이 결국 거부권 행사로 치달았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이어 두번째다. 국회에서 재표결하더라도 양곡법처럼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은 중재법안을 만들겠다지만 민주당과 간호협회가 응할지는 미지수다. '거부권 정국'을 두고 여야가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느라 여념이 없다. 극단으로 치달아온 한국의 '의료 정치'가 이번에도 재현됐다. 정치권은 타협의 정치를 포기했고, 정부는 간호계와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본회의 직회부 간호법 91일 파동이 남긴 것

간호법은 31개 조로 돼 있다. 23개 조항은 의료법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면허·자격, 업무 범위, 결격사유 등이다. 새로운 건 7개 조항이다. 간호사 지원 관련 국가 및 지자체의 책무, 간호사 등의 권리⋅책무, 인권침해 금지, 일⋅가정 양립 지원 등이다.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중요한 건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런데도 정면충돌한 이유는 간호사의 단독 개업 우려 때문이다. 이번 법안의 기초가 된 민주당 김민석 의원 발의 법안(2021년)에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의사 지도 또는 처방 하에 시행하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규정했다. 반발이 일자 '의사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라는 지금의 의료법 조항으로 되돌아갔다. 의협은 거부권이 행사된 간호법의 '지역사회'라는 조항도 단독 개업의 근거라고 의심한다.

의료계는 정말 복잡하다. 의사·한의사·치과의사·간호사·간호조무사, 임상병리사·방사선사·물리치료사 등의 의료기사, 보건의료정보관리사·안경사 등이 영역 다툼을 벌인다. 때로는 타투이스트·피부미용사 등과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가는 사달이 난다. 90년대 중반 한약분쟁, 2000년 의약분업 파동, 2020년 의대정원 관련 의사 파업도 그랬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거부권 행사 이유로 "간호 업무의 탈 의료기관화는 국민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버스가 멈추면 택시·지하철·관광버스가 있지만, 의료행위는 대체재가 없다. 미우나 고우나 그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을 고치거나 만들 때 파장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5월 보건복지위 제1법안소위를 시작으로 복지위 전체회의, 본회의 직회부, 지난달 27일 본회의 통과까지 반대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국민의힘이 퇴장한 채 홀로 처리했다. 복지위 결정 때 간호사 출신인 국민의힘 최연숙 의원만 남았다. 처음부터 의협 등의 단체나 보건복지부가 반대했으나 무시했다. 이들에겐 46만명의 간호사 표만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때마침 간호협회는 '1인 1정당 가입' 운동을 시작했다.

국민의힘은 여당이다. 정국을 이끌어가야 하고 반대자를 설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간호법 표결 이틀 전인 지난달 25일에서야 정부와 함께 간호사 처우개선책을 포함한 중재안을 내놨다. 이후 야당과 한두 차례 협상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14일에는 고위당정협의회 회의는 대안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간호협회에 불을 붙였다. 국민의힘 강민국 수석대변인은 "간호법은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하는 입법독주법" "신카스트 제도법"이라고 간호계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간호협회 관계자는 "의사처럼 파업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언제 국민 생명을 볼모로 잡았느냐"고 서운함을 표시했다. 당정협의회에서 중재방안을 찾진 못할 망정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16일 오후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현장 간담회에 참석하는 가운데 고려대 안암병원 간호사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법률안 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16일 오후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현장 간담회에 참석하는 가운데 고려대 안암병원 간호사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법률안 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보건복지부도 소통이 부족했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달 25일 간호사 처우개선책을 내놨는데, 늦어도 너무 늦었다. 지난 2월 민주당이 본회의 직회부 카드를 만지작거려도 복지부는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거부권 행사 나흘을 앞둔 지난 12일에서야 간호협회를 찾아 단식 농성 중인 김영경 회장을 만났다. 지난 2월 간호법 직회부 이후 두 번째 방문이었다. 복지부는 의료계 직역간 갈등이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오는지 수없이 경험했지만, 첫 경험자처럼 허둥댔다.

간호협회는 16일 “간호법 제정을 위한 투쟁을 끝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오후 전국 대표자 회의를 열어 준법투쟁 여부 등을 밤새 논의했다. 간협 회원의 98.6%는 '적극적 단체행동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준법투쟁은 1만여명의 PA(진료 보조) 간호사들이 간호사 업무 외의 일을 하지 않는 걸 말한다.

지금은 크고 작은 병원에서 수술을 보조하거나 야간 입원실에서 의사 ID를 넣어서 처방한다. 때로는 방사선사 역할까지 한다. 미국 등에선 합법이지만 우리는 근거가 없다. 정부와 병원 측이 묵인한다. 이들이 준법투쟁을 하면 수술이 20~30% 줄어들고, 야간 입원실을 의사가 지켜야 한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전문의나 수련의들을 투입할 수 있지만, 준법투쟁이 일주일 이상 계속되면 혼란이 안 생길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의사면허 취소법'으로 알려진 의료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의사 범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법이 공포되면 의사가 금고 이상의 실형을 받고 집행이 끝난 후 5년, 집행유예 종료 후 2년 더 면허가 취소된다. 지금은 진단서 허위발급, 업무상 비밀 누설, 응급의료법 등 의료관계 법령 위반만 취소하지만, 앞으로는 범죄 종류와 무관하게 적용한다.

박명하 의협 ‘간호법·면허박탈법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중앙일보와 만나 “젊은 의사들이 많이 아쉬워하고 반발이 크다”고 말했다. 그래서 의사들 사이에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이 나온다. 다만 살인 등의 강력범죄와 성범죄 등은 포함해야 하지만 교통사고·폭력 행위를 면허 취소 범죄에 넣는 게 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16알 오후 브리핑에서 “모든 범죄에 면허를 취소하는 게 과도하다는 여론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관련 법 개정 방향에 대해 당정 협의를 진행하겠다”라고 말했다.

지금 대안은 타협이다. 서로 한발씩 양보하는 방법 외는 묘수가 없다. 간호협회도 간호법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도 간호법의 취지를 최대한 살려 중재안을 만들어야 한다. 간호사 처우 개선, 돌봄과 간호사의 역할 조화는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또 간호사를 늘려 현장에서 간호업무 외 의료 행위를 하는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국 의료가 세계 최고 실력을 자랑하지만 이렇게 갈등을 빚고 있을 때가 아니다"며 "세계는 코로나19를 계기로 e-헬스 시대로 달려간다. 의사·간호사 등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다. 서 전 장관은 "신뢰할 만한 전문가나 의료계 원로로 구성된 중재기구를 만들어 거부권 이후의 타협책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