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왜 내연녀 아들이 제사 권리 갖죠?" 대법 뒤집은 두딸 엄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돌아가신 분의 유해는 누가 관리할까. 민법은 '제사 주재자'가 유해에 대한 권한이 있다고 규정한다. 이 제사주재자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중앙포토

돌아가신 분의 유해는 누가 관리할까. 민법은 '제사 주재자'가 유해에 대한 권한이 있다고 규정한다. 이 제사주재자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중앙포토

“내가 부인이고,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컸는데 왜 내연녀 아들이 권리를 가지나? 싶었어요”

 15일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A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지난 11일 제사주재자의 자격에 관한 성별의 벽을 허문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원고인 A씨는 “너무 당연한 걸 너무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해서 받아낸 데다, 이길 거라는 믿음이 강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에도 ‘제사주재자’가 있다. 돌아가신 분의 유해에 대한 권한은 제사주재자가 갖는다고 명시한 민법 때문이다. 이날 판결로 ‘적자, 남자, 장손’을 우선시하던 제사주재자의 자격에 관한 관습적 규범은 모두 깨지고 성별불문 ‘나이순’이 제사주재자 선정의 원칙으로 남겨졌다. 민법 제정(1958년) 65년만이다. 2017년 사망한 한 남성의 부인 A씨와 두 딸이, 망자의 내연녀와 한 추모시설을 상대로 ‘유해를 돌려달라’고 청구한 소송의 결말이었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다, 대법 전원합의체까지 가면”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김민선(연수원 34기) 변호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제공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김민선(연수원 34기) 변호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제공

 시작은 A씨의 나홀로 소송이었다. A씨는 “번거롭기도 했지만,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며 “내 상식에선 당시의 상황을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A씨 쪽은 혼인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법적 부인이고, 성년인 큰딸과 고등학생인 둘째딸이 있었다. 상대는 혼외의 여성이었고, 초등학생 남자 아이가 하나였다. 혼인관계로 보나, 자녀들의 나이로 보나, 머릿수로 보나 “나와 두 딸이 유해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게 맞다”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상식’을 믿고 시작한 다툼이었다.

그러나 ‘제사 주재자는 적서를 막론하고 아들 우선’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는 걸 알게 된 뒤 멈칫한 A씨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았다. 기초수급자 등을 위한 법률소송을 담당하던 상담소는, 처음엔 ‘소득이 있어 요건이 안된다’며 돌려보낼 뻔도 했다. 그러나 상담소 소속 변호사인 김민선(45·연수원 34기) 변호사는 “2008년 대법원 판결을 아무리 곱씹어도 납득이 안돼서, 이건 좀 바꿔보자고 생각했다”며 기획 소송을 준비했다. 정미화(17기)‧이명숙(19기)‧배인구(25기)‧천정환(33기)·김상훈(33기)·황현정(34기) 등 가사법에 내공이 깊은 변호사 7명이 달라붙었다.

김 변호사는 “처음부터 대법원까지 가서 이길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했다”며 “선행 판례가 있어 1,2심은 어렵더라도, 전원합의체에 회부만 된다면 무조건 뒤집히는 사건이라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2018년 7월 대법원에 접수된 이 사건은 지난해 11월 전원합의체로 넘어갔다. 김 변호사는 “그때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유해를 제사용 재산의 일부로 본 법리에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김민선 변호사는 “유해는 추모의 대상이고 사람이 변해서 된 건데 단순 재산으로 보는 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돌아가 다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제시한 원칙대로라면 사망한 A씨 남편 유해에 대한 권리는 자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A씨 큰딸에게 돌아간다.

제사는 누가? 느리게 바뀌어온 법

당연히 아들이, 없으면 양자라도
‘제사를 누가 지낼 것인가’는 비교적 최근에 제기된 물음이다. 장손을 우선시하는 유교적 관습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스럽게 장남이나 장손이 제사를 넘겨받아왔다. 대를 이을 아들이 당연히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여기던 문화에서 아들이 없으면 양자라도 들여 제사를 이어받기도 했다.

그래서 법이 처음 만들어 질 때도, 당연히 호주가 제사를 넘겨받는 것으로 상정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친 뒤 1958년 처음 만들어진 민법 996조는 ‘금양임야와 묘토인 농지, 족보와 제구 소유권은 호주상속인이 승계한다’고 규정했다.

1958~1990년 : 제사는 당연히 호주가
관습적으로는 나이 많은 아들(장자)가 최우선, 그 다음은 가장 나이가 많은 손자(장손), 이어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 서자 순으로 우선권이 돌아갔다. 원칙적으로는 호주를 이어받을 남성이 도무지 없을 경우 여성이 호주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성이 기존 호주 혈통의 아이를 낳지 않는 이상 여성 다음으로는 호주를 이어받을 수 없어, 흔히 ‘대가 끊겼다’고 표현하며 기피의 대상이었다. 호주가 제사를 당연히 가져가지 않게 법이 분리된 건 1990년 민법 일부개정 때다. 민법 중 상속 부분에 현재의 민법 1008조3이 생겨났다. 기존 문구에서 ‘호주상속인’ 대신 ‘제사를 주재하는 자’라는 용어가 들어간 게 차이점이다.

2005년 : 호주제 폐지, 제사 주인도 흔들었다
2005년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부터 본격적으로 제사 주재자 분쟁이 시작됐다. 2008년 친족을 규정한 민법에서 ‘호주승계’ 관련 조문들이 모두 삭제되며 호주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2008년 : 적서차별 폐지·협의 가능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그간 공공연히 ‘적자 다음 서자’로 보던 관습을 깨고 ‘적서를 막론하고 장자 내지 장손’이 우선적으로 제사주재자가 된다고 판시했고, 공동상속인들이 협의할 경우 이 원칙과 상관없이 제사주재자를 지정할 수 있다고도 규정했다. 규범적으로 적자와 서자의 차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제사는 남성의 몫이라는 관념은 여전했다.

2023년 : 남녀차별 없애고, 나이순으로
지난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적서와 남녀를 막론하고 ‘직계비속 중 연장자’ 순으로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판시했다. 2008년 대법원 판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녀 구분을 깬 판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