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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마세요, '컨셉트질'입니다…절약방이 혼쭐 자처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물 -500원”
“물을 왜 사드세요. 비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저를 운반해준 어르신께 감사의 인사로 -3800원”
“택시 타셨군요. (반성하세요).”

최근 Z세대 사이에서 유행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절약방(거지방)’은 스스로를 ‘거지’라 칭하며 소비 내역을 평가받는 방이다. 닉네임 옆 숫자는 그 주나 그 달의 누적 지출액이다. 14일 기자가 참여한 절약방 구성원들이 ‘편의점 -7만8000원’과 ‘인형 구매 -1만6000원’을 고백하고 혼나는 모습(오른쪽).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오픈채팅방 캡처

최근 Z세대 사이에서 유행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절약방(거지방)’은 스스로를 ‘거지’라 칭하며 소비 내역을 평가받는 방이다. 닉네임 옆 숫자는 그 주나 그 달의 누적 지출액이다. 14일 기자가 참여한 절약방 구성원들이 ‘편의점 -7만8000원’과 ‘인형 구매 -1만6000원’을 고백하고 혼나는 모습(오른쪽).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오픈채팅방 캡처

최근 Z세대(199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생) 사이에서 유행한 ‘절약방(거지방)’ 대화의 일부다. 절약방은 돈을 쓸 때마다 지출 내역을 적고 다른 사람들에게 혼나는 콘셉트의 오픈채팅방이다. 그러나 심각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소비 습관을 주제로 다양한 유머와 수다가 오간다. 지난 14일 기자가 참여한 절약방에선 “편의점에서 7만8000원을 썼다”거나 “인형 구매 1만6000원”과 같은, 절약과는 다소 거리가 먼 고백들과 이를 귀엽게 나무라는 모습들이 이어졌다.

‘청년 고통’은 오산…절약방은 ‘콘셉트 놀이’ 

절약방 참여자들과 전문가들은 ‘절약방’을 저성장·불경기가 부른 그늘로 보는 일각의 해석에 대해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쉽지 않은 현실이 탄생 배경이 된 건 맞지만, 이를 절약방이란 콘셉트로 희화화해서 극복하려는 일종의 놀이 문화로 봐야 한다”(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것이다. 절약방에 참여한 김모(18·여)양은 “진짜로 돈을 아끼려고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서로 드립(개그) 주고받는 게 재밌어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만화 캐릭터를 가상으로 등장시키는 절약방도 유행”이라고 말했다. 가상의 자아에 특정 콘셉트를 투영하는 게 일종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절약방에선 지출 내역을 솔직하게 쓰지 않으면 ‘눈속임 경고’도 받는다.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절약방에선 지출 내역을 솔직하게 쓰지 않으면 ‘눈속임 경고’도 받는다.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절약방 외에도 ‘콘셉트질’ 놀이 문화는 Z세대 사이에서 여러 형태로 유행하고 있다. 콘셉트질을 관통하는 코드는 ‘갓생(god生·현실을 열심히 사는 것)’이다. 소설 『해리포터』의 등장인물인 헤르미온느처럼 똑똑하고 똑부러지게 공부하겠다며 공유되는 ‘헤르미온느 공부법’ 등이 대표적이다. 동갑내기 대학생 커플 박모(21)씨와 양모(21·여)씨는 “시험기간에 호그와트 ASMR(해당 캐릭터가 된 것처럼 상상할 수 있게 잔잔한 시각·청각 효과를 준 영상), 중세 공주의 공부법 ASMR 등을 켜놓고 같이 공부한다”며 “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 웹툰 ‘바른 연애 길잡이’의 정바름 등이 갓생을 위한 몰입 대상”이라고 말했다.

헤르미온느의 방 등을 소리로 재현한 ASMR. 사진 유튜브 캡처

헤르미온느의 방 등을 소리로 재현한 ASMR. 사진 유튜브 캡처

콘셉트질 관통하는 코드는 ‘갓생(god生)’

‘콘셉트질’ 문화는 미디어 트렌드에서도 주류가 되고 있다. ‘일본 호스트남’ 다나카(본명 김경욱), ‘카페 사장’ 최준(본명 김해준), ‘신도시 젊줌마’ 서준맘(본명 박세미) 등 개그맨들이 재연하는 부캐릭터(부캐)가 인기를 끄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10~20대들 사이에서는 ‘한국지리 일타강사’, ‘일진’, ‘전교 1등’ 등의 콘셉트를 잡고 콘텐트를 만드는 유튜버들도 50~100만명 이상의 구독자를 확보하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시계 방향으로) 개그맨 강유미의 부캐 ‘도믿걸’과 ‘동네 미용실 아주머니’, 유튜버 사내뷰공업의 부캐 ‘일진 황은정’과 ‘이과 전교 1등 김혜진’. 사진 유튜브 캡처

(시계 방향으로) 개그맨 강유미의 부캐 ‘도믿걸’과 ‘동네 미용실 아주머니’, 유튜버 사내뷰공업의 부캐 ‘일진 황은정’과 ‘이과 전교 1등 김혜진’. 사진 유튜브 캡처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오프라인 자아 하나로만 살아온 기성 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Z세대는 어릴 적부터 게임 등을 접하며 아바타가 있는 삶을 살아왔다. 자연히 ‘디지털 자아’를 갖고 노는 문화에 익숙하다”며 “온라인 없는 삶의 기억이 없는 Z세대에겐 온라인이 디폴트(기본값), 오프라인은 옵션(선택값)”이라고 해석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과거 청년 세대가 YOLO(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번 뿐이니 현재를 즐기자)로 정의됐다면 요즘 Z세대는 책임감 있는 갓생을 지향한다”며 “절약방이나 과몰입 ASMR처럼 여유롭고 재미있게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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