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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희의 미래를 묻다

성 분화는 다양성 확보 전략…무 자르듯 양성 구분 힘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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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2023년 2월, 서울서부지법 항고심 재판부는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온 A씨에게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허가했다. 이미 2006년 6월, 대법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마친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성별 정정을 허가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이 판결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는 마뜩잖다는 시선이 많았는데, 이는 그가 여성으로 자각하고 오랫동안 호르몬 치료를 받아왔으나 남성 성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XY외에 다양한 성염색체 존재
자연의 성별은 사람보다 다양
미, 남·여 외 ‘젠더 X’ 표기 허용
성별 구분 개인의 판단에 맡겨

성별, 개인의 기본적인 정보?

지난해 6월 태국 파타야에서 열린 미스 인터내셔널 퀸 2022 트랜스젠더 미인 대회에서 ‘미스 필리핀’ 푸시아 앤 라베나가 1위에 올라 감격에 겨워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6월 태국 파타야에서 열린 미스 인터내셔널 퀸 2022 트랜스젠더 미인 대회에서 ‘미스 필리핀’ 푸시아 앤 라베나가 1위에 올라 감격에 겨워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시민들의 인식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 바로 응답자의 연령대·거주지역·성별을 묻는 문항이다. 특정 인구 집단의 특성으로 이 요소들이 제안되는 것은 연령대와 거주지, 성별 등의 요소는 명확히 구별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렸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이들이 성별이란 남녀의 두 가지로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사람의 성별은 염색체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물학적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의 염색체는 23쌍(총 46개)으로, 이 중 22쌍은 상염색체로 남녀 모두 동일하지만, 성염색체 1쌍은 남녀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여성은 동일한 X 염색체 2개가 한 쌍을 이루지만, 남성은 하나의 X 염색체와 하나의 Y 염색체가 짝을 이룬다. 간혹 감수분열 시 염색체가 균등하게 분리되지 못해 성염색체가 2개가 아니라 1개 혹은 3개 이상인 사례도 드물지 않다. 성염색체가 XXY인 클라인펠터 증후군, XYY인 야콥증후군, X 염색체만 1개인 터너증후군, 성염색체 XXX인 트리플 엑스 증후군 등 다양하다. 흔히 Y염색체의 존재 여부가 남성을 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현실은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다. 현실에서는 외형적으로는 의심할 바 없는 남성이지만 염색체는 XX인 경우도, 분명 XY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여성의 전형적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염색체형에 상관없이 난소와 고환을 모두 가진 경우 등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성이 결정되는 다양한 과정들

사람에게는 성별 구분이 비교적 명확해 보이는 데 반해 자연계에는 다른 경우도 많다. 성적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거나 심지어 변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바다거북이나 악어와 같은 파충류는 온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바다거북은 알이 묻힌 모래사장 주변의 온도가 섭씨 28도보다 낮으면 수컷으로 태어나고, 높으면 암컷으로 태어난다. 악어는 반대로 알이 놓인 환경이 섭씨 31도보다 낮으면 암컷이, 이보다 높으면 수컷이 된다. 보넬리아라는 이름의 작은 해양생물의 성 결정법은 더 특이하다. 보넬리아의 유충은 독립적인 생활 습성을 유지하면 암컷으로 자라난다. 유충의 운명이 달리 결정되는 순간은 우연히 다른 암컷 보넬리아를 만나는 경우다. 암컷 보넬리아를 마주친 유충은 즉시 다른 암컷에게 달라붙고, 이후 수컷으로 자라난다. 이를 ‘환경 의존성 성 결정’이라 하는데, 타 개체와의 만남이 성별을 결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셈이다.

심지어 성별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머리 부분이 유난히 파란색이어서 블루헤드놀래기라는 이름이 붙은 물고기는 무리 내 수컷이 사라지면 남은 암컷 중 하나가 수컷으로 변신한다. 그저 역할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암컷의 난소가 사라지고 고환이 발생하면서 완벽한 수컷이 된다. 이런 변신에 걸리는 시간은 겨우 20일 남짓이다. 굴은 더 자유롭다. 알에서 깨어난 굴은 대부분 수컷이지만, 성장하면서 이들 중 일부가 암컷이 된다. 하지만 암컷이 된 이후에도 먹을 것이 부족하면 다시 수컷으로 돌아가는 등 수시로 성전환을 일으킨다. 정자보다 큰 알(난자)을 만들기 위해서는 먹이가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굴에게 있어 성별이란 살아남아 후손을 낳기 위한 매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전략적 선택일 뿐이다.

생존확률 높이기 위해 성 분화

진화 과정에서 처음에는 성이 없는 무성 상태였던 생명체들이 암컷과 수컷의 두 가지 성으로 분화한 것은 유성 생식이 무성 생식보다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유전적 구성이 다양해야 환경이 변화하고 여러 기생 생물이 침입해도 모든 개체가 한꺼번에 몰살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암수가 서로의 유전자를 섞어야 번식할 수 있는 유성생식은 천문학적 확률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진화 과정에서 성이 분화한 이유는 다양성을 확보해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였지, 성을 구분하고 성별로 전형적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2022년 4월, 미국 국무부는 미국 여권을 발급받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전통적으로 표기했던 남성(M)과 여성(F) 외에 ‘젠더 X’를 표기할 수 있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이 X 표시는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나 확고하게 남성 혹은 여성으로 구분되지 않거나, 혹은 구분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법적 성인이라면 누구나 여권 성별 정보에 X를 표기할 수 있으며, 이때 의학적 소견서나 다른 증명서를 첨부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성별의 구분 기준을 전적으로 개인의 소관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화했던 성별의 구분이 다시 사회적 다양성을 넓혀나가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