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때, 방시혁은 세계 음악업계의 성공신화로 불린다. 특히 국내에선 가요 3사(SM·JYP·YG)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그래미 후보에 오르며 ‘중소의 기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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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시혁의 음악·경영 커리어는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작곡가 데뷔~BTS 이전의 제작(1994~2013), BTS 데뷔~하이브 상장(2013~2020), 하이브 상장 이후(2020~현재).
지금의 하이브 모습은 방시혁이 2005년 2월 1일 전신인 ‘더빅히트엔터테인먼트’(거의 직후 빅히트로 사명 변경)를 설립했을 때부터 꿈꿨던 형태다. 사명 빅히트(크게 히트한다)와 방시혁 예명 히트맨(Hitman Bang, 저격수 혹은 암살자)만 봐도 대단한 야망이 느껴진다. 이 시기 그를 지켜본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에서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이 황당한 포부는 현실이 됐다. 올해 4월 기준 하이브의 시가총액은 9조7700억원가량이다. 방시혁은 하이브 의장으로서 이사회를 이끈다. 대학생 작곡가에서 글로벌 기업의 의장이 되기까지 방시혁의 시간은 어떻게 흘렀을까.
‘공부 천재’의 험난한 엔터 입문기
1994년 11월 한양대 백남음악관에서 제6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가 열렸다. 방시혁이 음악 산업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는 시작점이 된 날이다. 대학 졸업을 즈음해 방시혁은 신시사이저로 노래를 만들어보다가 상업음악 작곡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렇게 주변의 권유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됐고, 자작곡 ‘연가’로 동상을 수상했다.
그의 첫 자작곡은 중학교 3학년 때 만든 ‘데이지’다. 방시혁은 어머니가 클래식 기타를 배워볼 것을 권한 계기로 기타를 독학하고, 중학생 때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해 파고다공원에서 공연하는 등 학창 시절 내내 음악에 빠져 있었다. 해외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살다 귀국한 뒤 책만 읽었던 그에게 음악은 탈출구였다.
학창 시절엔 ‘재수 없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엔 서울대 법대를 1지망했고, 집안에서도 법조인이 되길 바라는 분위기였다. 방시혁은 2011년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다. ‘공부는 약간 쓱 봐서 1등 하고 이래야 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있을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방시혁 아버지 방극윤 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이래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서울대 법대를 추천했다. 그런데 음악을 한다고 하니 특히 할아버지가 결사반대했다. 우리 내외도 장래가 몹시 걱정됐다. 우리 세대는 음악으로 밥 먹고 살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