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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범 누명 살리에리, 영상 언어 마력과 음모론 희생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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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호 22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오페라 ‘굴뚝 청소부’ 자필 악보(1782). [사진 사회평론]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오페라 ‘굴뚝 청소부’ 자필 악보(1782). [사진 사회평론]

음악사에서 누구보다 억울한 음악가가 한 명 있다면 단연코 안토니오 살리에리일 것이다. 모차르트를 살해하기는커녕 비난한 일조차 없었는데도, 300년 가까이 온 세상 사람들이 그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누명을 쓰게 됐을까? 그럴싸한 내용으로 포장된 음모론 때문이다. 세기의 천재 모차르트가 3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원인을 알고 싶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내고 있던 모차르트가 아프기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사망했다. 게다가 사인도 분명치 않단다. 당시 의사는 사인을 발열과 발진이라고 했으나 그것은 단지 병의 증상일 뿐이었다. 그의 사망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못했고, 서둘러 무덤에 묻힌 그의 시신 역시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모차르트와는 선의의 라이벌 관계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가 독살되었다고 믿었다. 그 믿음에는 모차르트 자신도 일조했다. 사망하기 전, 몇 개월 동안 두통과 전신 통증에 시달리던 그는 누군가 자기에게 독약을 먹였을 것으로 의심했다. 쇠약해진 모차르트의 상상력이 만든 판타지였지만, 다리에서 발견된 종양이 중독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의사 소견이 더해지면서 독살설은 빈 전체로 빠르게 퍼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 베를린의 한 신문에 실린 보도는 독살설을 유럽 각지로 전파했다. 게다가 모차르트가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곡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레퀴엠이라는 사실은 그의 죽음을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작곡하기 시작하자마자 병이 났으나, 작업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완성하는 데 혼신을 바쳤다. 병세가 악화하여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는 곡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구상을 제자에게 설명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게다가 ‘레퀴엠’을 의뢰한 사람의 정체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거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대중의 의심은 더욱 커지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아마추어 음악가인 발제크 백작이 죽은 아내를 위한 레퀴엠을 자신의 곡처럼 포장해서 발표하기 위해 궁핍한 모차르트에게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했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병중에서도 작곡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거액의 작곡료 때문이 아닐까.

요제프 빌리브로르드 말러,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초상화(1815). [사진 사회평론]

요제프 빌리브로르드 말러,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초상화(1815). [사진 사회평론]

그런데 의심의 화살이 왜 살리에리에게 겨눠진 것일까. 시작은 모차르트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빈에 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모차르트가 가장 부러워했을 사람은 다름 아닌 살리에리였다. 그는 모차르트보다 6살밖에 많지 않았지만 당시 빈 궁정에서 황제에게 총애를 받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다. 지금의 명성으로만 따지면 모차르트와 경쟁이 되지 않겠지만, 그 시기 둘의 위상은 지금과는 정반대였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황제의 관심은 온통 살리에리 뿐”이며 “궁정의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이탈리아인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불평한 것이 한 예다. 모차르트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피아노 레슨에서도 신분 높은 공주들을 가르치는 좋은 기회는 모두 살리에리에게 돌아갔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자기의 앞길을 방해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듯하다. 빈 궁정 시인인 레오나르도 다 폰테로부터 오페라 대본을 받고 싶은데 그가 살리에리와 가까우니 자신은 죽을 때까지 그의 대본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다 폰테는 모차르트가 작품을 제안했을 때 기꺼이 대본을 써줬고, 이 역사적인 협업을 통해 일명 모차르트-다 폰테 3부작으로 불리는 위대한 걸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코지 판 투테’가 탄생했다. 애당초 다 폰테를 궁정에 소개해 빈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살리에리이니 이 두 사람의 가까운 사이를 질투하는 모차르트가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모차르트의 피해의식이 강했던 때문이리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경쟁 구도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것이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는 연회에서 이 둘에게 오페라의 한 막을 각각 작곡하게 해서 경합을 붙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승자를 알 수는 없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활약했던 두 사람이지만 생전에 이 둘이 반목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두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할 때 서로를 도우며 지냈을 확률이 더 높다. 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 나중에 발견되어 세계 초연되었던 일도 있었으니까.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고 출신인 살리에리는 음악 실력 하나만으로 정상의 자리까지 오른 보기 드문 능력자다. 10대 초반에 부모를 잃은 그를 베네치아의 귀족 조반니 모체니코가 거두어주었고 음악 공부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살리에리는 베네치아에서 빈 궁정에서 활약하던 플로리안 레오폴트 가스만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베네치아 출신인 가스만은 자기 작품의 공연에 맞춰 고향에 들렀다가 재능이 많은 살리에리를 보고 그를 빈에 데려가 아들처럼 보살피고 가르쳤다. 그는 살리에리를 당대 최고 극작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와 최고 오페라 작곡가 크리스토프 글루크와 교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살리에리는 글루크를 대신해 오페라를 발표할 기회를 얻었고 이 일을 매우 훌륭히 해냈다.

보고 싶은 대로 믿는 음모론 피해자

살리에리 기념비ⓒThreecharlie. [사진 사회평론]

살리에리 기념비ⓒThreecharlie. [사진 사회평론]

가스만의 도움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요제프 2세의 저녁 식사에 맞춰 매일 연주되는 실내악 연주회에 살리에리를 데뷔시킨 것이었다. 요제프 2세는 살리에리가 매우 맘에 들었던지 토스카니의 레오폴트 대공, 롬바르디의 페르디난트,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 왕비 등 자기 형제들에게도 소개를 했고, 그 덕분에 살리에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요제프 2세의 살리에리에 대한 애정은 그가 사망하던 순간까지 20여 년간 한 번도 변치 않았다. 1774년 궁정 작곡가였던 가스만이 사망했을 때 요제프 2세는 24세에 불과했던 살리에리를 그 자리에 임명했으며 가스만이 맡았던 빈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감독 자리도 그에게 물려주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황제는 살리에리를 궁정 음악 최고 책임자인 카펠마이스터로 임명했고, 그는 26년간 이 직책을 유지했다.

한편 오페라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살리에리는 어린 시절 자신이 가스만을 비롯한 스승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듯 젊은 음악가들을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교육자로서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아서 베토벤, 슈베르트를 위시하여 요한 훔멜, 안톤 에베를 같은 전도유망한 작곡가들이 모두 그에게 배우려고 몰려왔다. 작곡뿐 아니라 성악적 기교 교습에도 뛰어나서 카트리나 카발리에리와 테레제 가스만 같은 당대 유명 콜로투라 소프라노를 배출했으며, 어린 프란츠 리스트에게는 음악 이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심지어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도 모차르트가 사망한 후에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의 아들을 보내 음악을 배우게 했으니, 음악 교육가로서 살리에리의 실력은 가히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살리에리의 말년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불어 닥친 사회적 격변은 그를 힘들게 했다. 특히 1790년 그를 총애하던 요제프 2세가 사망한 후 그는 창작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1805년에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었고 2년 후 아내까지 잃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나 그것이 허전함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했는지 살리에리는 자살을 시도했고, 이후 치매에 걸려 1년 반 동안 병원에서 고통받다가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화 ‘아마데우스’ 도입부에서 살리에리가 망상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강렬한 씬은 사실에 근거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차르트를 독살한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밀로스 포만 감독에게는 행운이었으나 살리에리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다. 영상이 주는 마력으로 기존의 음모론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으니. 그럴듯한 스토리를 찾고 그것을 믿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그래서 문명과 종교가 탄생했으니,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음모론이 되어 애꿎은 희생자가 생기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너무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으면 한 번쯤 의심할 일이다. 또 하나의 음모론일지 모르니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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