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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과거·현재·미래사 뒤엉킨 ‘왕가위 유니버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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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호 24면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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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때로 기이할 만큼 비슷한 경향성을 보인다. 곧 다가올 한국의 6·10 항쟁 주기와 홍콩의 6월 민주화운동 시위는 여러 가지로 닮은꼴을 지니고 있음을 반추하게 만든다. 홍콩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유 없는 상실감이나 원(怨)이 배어 있는 느낌을 주는데 그 모두가 우리의 한(恨)을 닮아 있다.

홍콩 사람에게 중요한 1967·1997·2046년

홍콩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연도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1967’이고, 또 하나는 ‘1997’, 그리고 ‘2046’이다. ‘1967’은 1967년 홍콩 봉기가 일어났던 해다. 홍콩 내 영국 자본가들을 주 타깃으로 했던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본토인 중국 공산당이 지원했지만 실패했으며 이후 홍콩은 급격하게 서구화의 공간이 됐다. 그러나 그렇게 영국화 됐던 홍콩은 30년만인 1997년 중국에 반환되지만 중국 공산당은 향후 50년간 홍콩의 자치권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한다. 일국양제(一國兩制)의 구현이다.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귀속되는 때는 2046년. 지금부터 20여년 후 홍콩은 또 다른 세상이 된다. 그 사이 2019년 6월 9일에 터진 홍콩민주화운동 시위는 1967년 때와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공산당이 탄압하고 영국 등 서구 국가가 지지하고 옹호했다.

당연히, 홍콩 사람들 일상에는 늘 정치사회적 시한부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다. 그들에게 있어 2046년은 환경문제로 지구가 멸망하는 것과 같은 느낌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최후를 바라보며 사는 심정은 종종 매우 찰나적이면서도 허무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 기이한 세기말적 정서를 자신의 전작에 분산 배치한 사람이 바로 왕가위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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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영화의 특징은 한 편만으로는 바로 그 ‘한 편 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거의 전편의 영화가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거나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능한 그의 영화 전부를 봐야 하는 이유이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2046’이 대표 작품들이다. 왕가위 영화는 또, 매우 당연하게도 홍콩이라는 공간의 과거와 현재, 그 현대사를 알지 못하면 도무지 이해가 불가한, 요령부득의 작품으로, 매우 불친절한 영화로 읽혀진다. 왕가위 영화는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교묘히 만나고 특정한 시기가 전체의 시대를, 혹은 홍콩 현대사의 흐름이 홍콩인 개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왕가위 영화 몇 편은 세부적으로 분절돼 있거나 연결돼 있다. 각각의 영화를 띄엄띄엄 보거나 기억하는 사람들은 늘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일단 그의 초기작 격인 ‘아비정전’으로 시작해 보면 이렇다. 왕가위의 ‘아비정전’은 이 작품 한 편만 볼 수 있었던 1990년에는 실로 무책임하고 정체가 모호한, 매우 불친절한 작품이었다. 인물에 대한 앞뒤 정황이 이후에 만들어지는 다른 작품을 통해서야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뜬금없이 양조위가 등장해 대사 한 마디 없이 외출 채비를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10년 후에 나올 2000년 영화 ‘화양연화’의 남자 주인공 차우의 일상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셈이 된다. 따라서 ‘아비정전’은 ‘화양연화’의 전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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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에서 차우는 신문사에서 일하며(기자는 아니고) 무협소설을 연재하고 돈을 벌지만 버는 족족 도박으로 날리는 인물이다. 그가 신문사에서 무협소설을 끄적거릴 때 이상하게도 편집국에는 거의 사람이 없는데 바깥은 늘 시위 때문에 소음이 심하고 어수선한 상태다. 대다수의 기자들은 그걸 취재하러 나간 상태다. 이른바 ‘홍콩 봉기’ 때이다.

‘아비정전’ 마지막 장면에서 차우는 담배 두 갑을 챙기고 트럼프 카드 한 갑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길을 들인 후 주머니에 넣는다. 그는 아마도 아직은 수리 첸(장만옥)을 만나기 전으로 보인다. 차우는 세상에 별 뜻을 잃고 싸구려 소설과 도박으로 삶을 이어 간다.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홍콩의 세기말적 모습을 닮았다. 차우는 그렇게 ‘데카당’한 삶을 이어간다. 그러다 만난 여자가 바로 이웃집 유부녀 첸 여사이다. 영화 ‘화양연화’는 이 두 남녀의 가슴 아픈 불륜의 러브 스토리를 그렸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수리 첸 여사라고 하는 이 여인은 10년 전 ‘아비정전’에서 아비(장국영)에게 버림받는 매점·축구장 매표원 아가씨이다. ‘아비정전’과 ‘화양연화’는 이후 2004년 발표된 ‘2046’과도 씨줄날줄로 이어져 있는데 ‘아비정전’의 댄서 미미(유가령)는 ‘2046’에서 캄보디아에서 돌아와 역시 도박에 빠져 사는 차우와 한두 번 만나는 관계다. 미미는 차우가 묵으려는 호텔의 2046호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영화 ‘2046’은 2046호 대신 옆방 2047호에 투숙해 소설 『2046』을 쓰는 남자 차우에 대한 얘기이다.

그런데 이 2046호는 이전 작품 ‘화양연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호텔 룸 2046호는 차우와 첸 여사가 불륜의 육체를 불태우며 함께 무협소설을 쓰던 공간이다. 차우와 첸의 관계는 이 2046호를 나가면서 끝을 맺는다. 왕가위가 보기에 홍콩은 차우처럼 살아가는 나라이다. 끝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과 같다. 차우가 첸을 사랑했듯, 홍콩은 영국을 사랑했으며 친서방에 대한 로망을 지니며 살아왔다. 차우와 첸이 2046호를 나가며 관계가 끝났듯 홍콩과 서구는 2046년 이후 단절될 것이다. 왕가위가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이다.

홍콩 영화 특유 상실감, 한국의 한과 닮아

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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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에서 첸과 차우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여주인은 ‘아비정전’에서 아비의 양엄마(반적화)이다. 아비는 필리핀으로 친엄마를 찾으러 갔고 해외로 밀입국할 요량으로 위조여권을 구하려다 총을 맞고 죽는다. 이때 아비와 도주 행각을 같이 하는 인물은 홍콩의 경찰관(유덕화)인데 이 인물은 ‘중경삼림’의 경찰관(양조위)과 영화 ‘해피 투게더’에서 장국영의 게이 애인(양조위)으로 약간씩 변형돼 등장한다.

왕가위의 인물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부유한다. 도저히 정착할 수 없는 공간에 살 수 밖에 없기에 끊임없이 바깥을 맴돌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얘기한다. 왕가위의 페르소나 양조위는 그래서 바로 홍콩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진다. 도박을 하며 여자를 탐하는 모습까지도 홍콩 불야성의 도시 풍경, 그 안의 욕망을 닮아 있다. 영화 ‘2046’에서 차우는 같은 호텔에 머무는 콜걸 바이링(장쯔이)과 격렬한 정사를 이어간다. 차우는 ‘화양연화’의 첸 여사와도 그랬다. 2046호에서. 그리고 그녀와 캄보디아로 도피하려다 결국 혼자만 가게 된 상황에서 앙코르 와트의 한 유적에 입을 대고 첸과의 사랑을 고백한 후 고대유물을 파묻어버리 듯 자신의 사랑을 묻어 버린다. 이후 그는 캄보디아 도박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름 역시 수리 첸(공리)이다. 그리고 봉기가 진압된 후인 홍콩으로 돌아와 여급인 미미하고 잠깐 만나고 콜걸인 바이링과는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대체로 이때는 1968년이나 1969년으로 보이는데 과거의 여자 첸 여사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키우는 것으로 잠깐 등장한다. 사랑은 잊혀졌다. 차우가 다른 여자를 전전하는 이유도 그 때문. 마치 미래의 홍콩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씨네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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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를 벌인 후 차우는 바이링에게 꼭 돈을 주는데 바이링은 그걸 매우 치욕적으로 받아들인다. 차우의 이런 행동은 영국이 홍콩에 이식했던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습관을 이후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가져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읽힌다. 사랑도 돈이 되는 세상, 그는 자본주의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호텔 주인의 딸인 징웬(왕페이)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남자(기무라 다쿠야)를 사랑하고 그것 때문에 정신병원을 들락거린다. 징웬도 중국화 될 홍콩을 떠나고 싶어 하는 셈이다. 호텔 사장의 딸처럼 홍콩(사람들)은 1997년 반환 이후 2046년까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중경삼림’에서 이어질 듯 말 듯 하던 관계의 매점 여자(왕페이)도 결국 꿈을 좇아 스튜어디스가 돼서는 미국 캘리포니아를 들락거린다. 영화 내내 매점 씬이 나올 때마다 마마스&파파스의 ‘캘리포이나 드리밍’이 꽝꽝 울려댄다.

2019년 6월 중국의 송환법 파동(반 중국 인사에 대해 본토 송환 후 대륙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으로 시작된 홍콩의 민주화운동과 그 시위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적어도 2046년까지는 다른 형태로라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 시위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의 가슴 속 풍경을 그려 볼 수 있는 영화들이 바로 왕가위의 작품들이다.

중국과 대만 간 긴장도 고조되고 있다. 중국과 홍콩의 1967-1997-2046년의 역사적 관계를 들여다보면 중국 vs 대만의 전망을 유추할 수 있다. 홍콩을 보면 대만이 보이고, 중국이 보인다. 왕가위의 영화를 보면 홍콩의 현대사가 읽히고 한국과 중국의 미래사가 보인다. 세상사가 보인다. 한 가지를 보면 만 가지를 알 수가 있다. 늘 그런 법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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