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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지금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그 꿈’ 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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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사람에 따라 생활 습관이 다르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꿈을 많이 꾸는 편인 것 같다. 그 가운데 각별하게 꾼 꿈이 셋 있다. 모두 나와 국가와 연결된 꿈이어서 평생 잊을 수 없다. 때때로 그 뜻을 되새겨 보곤 한다.

그 하나는 8·15광복 전날 밤과 새벽에 꾼 꿈이다. 내가 평양 서남쪽 진남포 바닷가에 갔는데 중학생 때부터 나를 키워 준 마우리 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바닷가였는데 커다란 창고 두 채만 남아 있었다. 선교사의 안내로 두 창고를 살펴보았다. 일본인들의 시신이 높은 창고 지붕에까지 닿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째 창고에는 대학 동창이었던 일본 친구의 시신도 있었다. 바닷물 때문이었는지, 모든 시체가 부풀어 있었다.

8·15 전날 꿈에 본 일본인 시신
큰 태양이 동쪽으로 저물기도

1950년 첫날에 본 공산군 행진
소련 스탈린의 초상화도 보여

1960년 4월 10일의 적막한 세상
붉은 피 흘리는 예수님 나타나

25세 때부터 평생 지켜온 교육자 자리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다시 잠들었는데 이번에는 쟁반같이 큰 태양이 서쪽이 아니고 동쪽 산 위로 서서히 낙하해 지고 있었다. 나는 한없이 넓은 옥토 한 편에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해는 저물고 저렇게 넓은 광야를 어떻게 다 갈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깨어났다.

그런 꿈이 계기가 되었을까. 나는 스물다섯 나이에 교육계에서 평생을 보내는 인생을 선택했다. 나이가 들수록 갈아야 할 밭이 넓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5년 뒤, 두 번째 꿈이다. 1950년 정월 초하룻날 밤이다. 내가 서울집 안에 잠들어 있었는데 가까운 문 앞에서 이상한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놀라서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내 오른쪽 앞과 왼쪽 뒤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왼편 북쪽을 바라다보았다. 행진하는 군대 멀리 뒤에는 소련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공산군이었다. 무장한 군인들은 한국 사람이기보다는 국적을 알 수 없는 군대 같았다.

그해 6월 25일이다. 전쟁 소식이 서울 시내를 뒤덮었다. 주말에 휴가를 나왔던 군인들은 부대로 돌아가고, 용산에 신축된 육군회관 낙성식에 초대를 받아 잔치에 참여하고 있던 지휘관들은 서둘러 전선으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근무하던 중앙학교 심형필 교장에게 제안했다. 이번 전투는 전쟁이고 서울이 점령당할지 모르니까 은행에 적금한 학교 재정을 되찾아 교직원에게 3개월치 봉급을 선불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심 교장은 내 뜻을 받아들여 재단이사장인 인촌 김성수의 승낙을 받았다. 그 덕택으로 우리 학교 교직원들은 3개월의 어려운 기간을 편히 넘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계기로 서른 살  새내기 교사였던 내가 인촌의 뜻에 따라 젊은 교감이 되고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인 부정선거 투표를 감행했다. 애국심을 갖고 투표에 임했던 사람들이 더 침묵할 수가 없었다. 마산의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시작했다. 대구에서도 젊은 학생들이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는 항의 데모에 동참했다. 그때 나는 연세대에서 6년 차를 맞고 있었다.

가시관 쓴 예수 보고 깜짝 놀라

4월 10일 밤 꿈이었다. 내가 서울시청 앞에서 광화문 쪽을 혼자 걷고 있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고 역사의 시계는 멈춘 듯이 만물이 잠들어 있었다. 태양 볕도 달빛도 아닌 미명의 빛이 온 세상을 감싸고, 인적이 사라진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광화문까지 갔더니, 사거리 한가운데에 구형으로 된 땅이 꺼져 있었다. 내려다보았다. 십자가에서 방금 내려놓은 것 같은 예수의 시신이 머리 방향을 동쪽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 창으로 찔린 자국 자리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가시관을 그대로 쓴 자세였다. 너무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두 번째 데모가 일어났다.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끝내고 돌아가다가 자유당이 사주한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거리에 쓰러지기도 했다. 날이 밝으면서 서울을 선두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행진이 벌어졌다.

나는 연세대생들과 함께 신촌에서 시청 앞과 광화문 쪽으로 행진하는 데모대에 참가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질 때까지 서울역에서 시청 앞,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앞까지 데모 군중으로 메워졌고 함성은 그치지 않았다. 그때부터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학생들이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데모는 밤늦게까지 계속되다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기대하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218명의 학생과 데모대원이 희생되었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지도자라면 국민과 아픔 나눠야

나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때는 이승만에 대한 원한도 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마음은 더 아팠을 것이다. 조국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그의 마음이야 얼마나 아팠겠는가. 이승만 주변 범죄자들의 엄벌을 바라는 마음도 컸다.

그렇다고 민족적 아픔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아픈 마음을 같이 하는 국민에게 있다. 그 아픔을 모르는 지도자나 공직자를 배제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지도자들과 아픈 마음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는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