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훈의 과학 산책

행복의 정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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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영훈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김영훈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학창시절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을 『행복의 정복』이란 베스트셀러의 저자로만 알고 있다가 대학에 와서야 이분이 본래 뛰어난 수학자였음을 알게 됐다. 그는 98년 긴 생애의 3분의 1을 수학자로, 다시 3분의 1을 철학자로, 나머지 3분의 1은 평화운동가로 각각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19세기 말 무한과 집합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사용하다가 여러 가지 모순들이 발견됐다. 청년 러셀은 모순이 없는 수학을 위해, 모든 수학적 논증을 최소단위로 분석하고 엄밀한 논리적 구조 위에 수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의 명저 『수학원리』는 수학기초론에 크게 기여했고, 영예로운 드모르간상과 실베스터상을 받았다. 중년이 돼 수학자로서 너무 어려운 문제들에 몰두하다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고 느꼈을 때 철학 연구를 시작했다. 평이하고도 명확한 논리로 어려운 철학적 주제들을 설명해 20세기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행복의 정복』, 『게으름 찬양』 등과 같은 대중 철학서도 다수 집필했다. 위트가 넘치고 따뜻한 시선이 가득한 글들의 문학성을 인정받아 195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년에는 평화운동가로서 영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해 싸웠고 인도의 독립에 기여했다. 인도에서는 그에게 감사하며 기념 우표까지 제작하였다. 그야말로 인생 3모작을 성공적으로 일군 셈이다.

힌두교에서는 인생 4모작을 말한다. 성년이 될 때까지 뛰어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는 성장기, 성년이 되어 가족을 이끌고 부양하는 가장기, 자식이 성장하면 가장의 책무를 넘기고 인생에 대해 성찰하는 숲속 생활기, 평화로운 죽음을 준비하는 출가기의 4단계가 바람직한 인생의 사이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백세시대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인생 다모작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선량한 의지로 행복을 정복한 러셀의 지혜와 삶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김영훈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