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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살해범이 새아빠라 한푼 못받았다…중1 두번 죽인 '구조금' [두 번째 고통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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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두 번째 고통…구조 받지 못한 사람들①] 구멍 난 피해자 지원망

 범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5년 간 범죄로 생명이나 신체에 피해를 입은 국민은 164만 4466명입니다. 범죄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중 하나입니다. 때문에 헌법 30조는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ㆍ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상당수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손길은 신기루처럼 다가옵니다. 갑자기 덮친 불행의 늪에서 구조받지 못한 채 ‘두 번째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60대 홍모씨가 딸을 잃은 건 2021년 설날 새벽이었다. 딸은 재혼한 사위에게 거실에서 살해당했다. 사위는 평소 의처증이 심했다. 딸을 발견한 건 중학교 1학년 손녀였다. 홍씨는 손녀의 전화를 받고 다급히 달려갔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119에 신고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딸을 떠나보내야 했다. 사위에겐 징역 10년 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고통은 끝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두 번째 고통은 범죄피해 못지 않았다. 딸의 죽음이 준 충격은 짧고 강렬했지만 이후 다시 살 길을 찾는 과정에서 닥친 고통은 길고 잔인하고 복잡했다. 구조가 필요한 범죄피해자를 제때, 제대로 거들지 못하는 범죄피해자 보호ㆍ지원 제도 때문이었다. 헌법 30조가 정한 범죄피해자 구조청구권에 따라 범죄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돼 있지만 현실의 구조망은 여전히 허술하기 짝이 없다.

살해 당한 딸…중1 손녀만 남았지만 구조금 못 받아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하 센터)의 피해자 모임에서 만난 홍씨는 눈물을 흘리며 “지금도 ‘엄마’하고 부르던 말이 귀에 맴돈다. 앞동에 살며 매일 같이 장도 보고 하던 딸이 가니, 몇 달을 죽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홀로 남은 손녀 때문에라도 홍씨는 살아야 했다. 손녀의 후견인이 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변호사가 손녀를 키워야 하니 유족 구조금을 신청해보라고 해 복잡한 서류를 챙겼지만 허사였다.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가해자와 범죄피해자가 사실상의 혼인관계를 포함한 부부거나 직계혈족, 4촌 이내 친족, 동거친족인 경우 구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딸의 보험 역시 수급자가 남편이라 손녀가 받을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범죄로 목숨을 잃고, 가해자인 다른 가족은 처벌 받은 상황에서 손녀와 홍씨는 사각지대에 몰렸다.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체 살인 사건 중 가장 많은 30.2%가 친족간 살해였다. 범죄피해자 지원망에 큰 구멍이 나있는 것이다.

홍씨는 지체장애를 안고 있고 남편이 택배일로 월 250만원 정도를 번다. 약 100만원 정도의 생계지원금은 3개월 뒤 끊겼고, 다른 지원은 손녀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받게 된 월 40만원 정도가 전부다. 범죄피해를 겪은 손녀는 도벽 등이 생겼고 피해 사실이 주변에 알려져 이사도 해야 했다. 홍씨는 “손녀는 엄마를 죽인 이와 피도 안 섞인 사이이고 앞으로도 혼자 살아가야 하는데, 나라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며 “법에 허점이 있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지난 3월 16일 울산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열린 자조모임의 모습. 범죄피해자들은 정해진 심리치료 지원을 받은 뒤에도 오랫동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각 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선 자조모임 등을 통해 피해자들이 만날 수 있게 하고, 다양한 활동과 소통을 통해 피해를 극복할 수 있게 돕는다. 황은지 사원

지난 3월 16일 울산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열린 자조모임의 모습. 범죄피해자들은 정해진 심리치료 지원을 받은 뒤에도 오랫동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각 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선 자조모임 등을 통해 피해자들이 만날 수 있게 하고, 다양한 활동과 소통을 통해 피해를 극복할 수 있게 돕는다. 황은지 사원

해당 조항은 가해자가 구조금의 수혜자가 되거나 구조금을 받게 하려고 일부러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예외를 두고 있다. 구조금의 실질적인 수혜자가 가해자로 귀착될 우려가 없는 경우 등, 구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사회통념에 위배된다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구조금을 줄 수 있도록 여지를 뒀지만 ‘예외’는 좀처럼 인정되지 않는다는 게 현장 목소리다. 한 센터 관계자는 “친족 살해인데도 구조금을 받은 사례는 이미 이혼 절차를 밟고 있던 부부 간 살해 딱 한 건 밖에 못봤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있는지도 몰라” 싸워야 받고, 늦으면 못 받는 지원

 구조의 손길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다양하다. 살인 범죄피해자가 가장 처음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지원 중에는 최대 400만원의 장례비가 있지만,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있는지조차 몰랐다”거나 “장례치르고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센터에서 연락을 받아 알게 됐다”는 반응이었다. 대다수 피해자들이 사건 이후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국가’는 경찰관이지만 피해자지원 관련 권한과 예산이 없는 경찰은 지원책에 대해 제대로 안내해주지 않는다. 검찰 단계나 기소 이후엔 범죄 성격에 따라 지원 주체가 법무부와 여성가족부ㆍ보건복지부 등으로 분산돼 있고 절차도 복잡하다.

2019년 4월 진주 아파트 방화ㆍ흉기난동 살인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도 거동이 어려울 정도의 부상을 입은 조모(36)씨는 “치료를 받는 동안 친척들이 생계도 뒤로한 채 지원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다. 정부기관에서 먼저 ‘이런 일을 해줄 수 있다’고 안내한 적은 없었다. 직접 찾아내서 묻고, 매번 싸워서 받아냈다. 묻기 전엔 담당자들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이어 “친척들마저 없는 피해자는 어땠겠나. 지원을 호소하려면 유가족들은 슬퍼할 시간조차 내놓아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는 피해자들의 심리적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진행한다. 화분에 식물을 심거나, 함께 악기를 배우는 등의 활동도 그 중 하나다. 영주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한 범죄피해자들이 화분에 식물을 심는 모습. 황은지 사원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는 피해자들의 심리적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활동을 진행한다. 화분에 식물을 심거나, 함께 악기를 배우는 등의 활동도 그 중 하나다. 영주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한 범죄피해자들이 화분에 식물을 심는 모습. 황은지 사원

신청 시기를 놓칠 때까지 아무런 안내도 조언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잦다. 구조금과 치료비ㆍ생계비 등 경제적 지원은 범죄피해 발생을 알게 된 날부터 3년, 혹은 범죄피해 발생일부터 10년이 지나면 신청할 수 없다. 실제 2017년 7월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한 A씨는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존재조차 몰라 혼자 수십만원의 치료비 등을 감당했다. 2022년에야 피해자 모임에서 지원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신청 기한을 훌쩍 넘긴 뒤였다.

“유학 꿈꾸던 딸, 10시간 알바”… 죽도록 버틴 뒤에야 도움

 피해자들은 ‘지원 타이밍’ 역시 문제라고 말했다. 범죄피해와 이후 어려운 생계로 인한 고통을 다 버텨낸 뒤에야 도움을 받을 수있는 게 현실이다. 2016년 7월 남편이 지인에게 살해당한 뒤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딸을 혼자 키워야 했던 오모씨는 남편에게 수억원대의 빚이 있었다는 걸 사건 이후 알게 됐다. 할 수 없이 상속 포기와 함께 남편이 남긴 재산 내에서만 채무를 승계하는 한정승인 절차를 진행했더니, 재산이 다 동결돼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는 “온갖 절차로 거의 석달동안 주민센터 등에서 살다시피 했다”며 “운영하던 가게도 접고 경제활동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거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나오는 생계비가 유일한 지원이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남편 사망 전까지 “중산층은 됐다”고 말할 정도였지만 사건 이후 오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첫째는 사진을 배우러 유학을 가고 싶어했지만 돈이 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대신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학 땐 10시간 넘게 일했다”고 말했다. 오씨는 7년이 지난 뒤에야 범죄피해자지원센터로부터 장학재단을 소개받아 학비 등을 지원 받았다.

“어려우면 일단 도울 수 있게 법·절차 개선해야”

 강력범죄 피해자의 치료비ㆍ생계비 등을 집행하는 검찰의 관련 예산 집행률은 되레 하향세다. 범죄 자체가 유의미하게 감소하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주는 지원만 줄어든 것이다. 2019년 범죄피해자보호기금으로 편성받은 예산 92억원 중 90억을 써 97.8%를 집행했지만, 지난해엔 89억원 중 67억원(75.3%)만 집행했다. 올해는 예산 자체도 69억원으로 줄었다. 법무부 등 관련 기관 전체가 쓰는 범죄피해자 보호기금 1133억원 중 피해자에 대한 직접 지원비는 약 25%인 284억여원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기관 운영비 등이었다. 이에 대해 법무부 측 관계자는 “피해구조금까지 더한 법무부의 경제적 지원금 예산 총액은 2019년 164억원이었고 이중 161억원을 써 98.2%를 집행했다. 지난해엔 예산이 148억원, 집행액은 131억원(88.3%)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집행률 감소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강력범죄 발생 건수가 줄어든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법을 고쳐 지원망을 촘촘하게 만드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안성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해자가 친족인 경우 사회통념에 위배될 때는 구조금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은 20여년 전 가정폭력 등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를 때 만들어진 법이라 학계에서도 계속 지적하는 부분”이라며 “친족간 범죄라도 사회보장 차원에서, 피해자가 어려운 상황에 있다면 일단 도와야 한다. 지원한 돈이 가해자에게 흘러가면 그때 몰수하거나 제한을 하는 식으로 제도 보완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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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수 서울남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사무처장도 “지원금에 대한 경찰 등의 안내도 모두 재량에 맡겨 편차가 크고, 지원 업무도 분산돼 있어 피해자가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운 구조다. 범죄 책임 규명이 사건 발생보다 한참 뒤 이뤄지거나 절차가 어려워 신청 기간이 지나면 법 테두리 내에서 지원이 불가능하다”며 “센터별로 자체 기금을 모으지만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이어 “범죄 수사 기관이 피해자 지원을 의무적으로 신청하도록 하고 원스톱 지원이 가능한 범죄피해자지원공단 같은 기관을 만들어야 실효를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법무부는 “지난해부터 범죄피해자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다른 부처 및 기관들과 함께 ‘범죄피해자 원스톱 지원체계 구축 협의체’를 구성해 회의를 개최하는 등 방안을 논의 중이며, 지원이 적시에 이뤄지도록 개선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울산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모습. 범죄피해 발생 이후 제때 지원 신청을 못할 경우 법 테두리내에서 지원을 할 수 없다. 때문에 센터에서 자체적으로 기금을 모아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한다. 황은지 사원

울산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모습. 범죄피해 발생 이후 제때 지원 신청을 못할 경우 법 테두리내에서 지원을 할 수 없다. 때문에 센터에서 자체적으로 기금을 모아 피해자들을 지원해야 한다. 황은지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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