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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강명의 마음 읽기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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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젊었을 때는 잘 어울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만남이 뜸해진 또래들이 있다. 딱히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고, 그냥 어느 순간부터 상대와 대화하는 게 재미가 없어졌다. 그들이 내가 잘 모르는 자녀 교육 문제나 골프 얘기만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모르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소설가라는 직업 특성상 소재를 얻기 위해서라도 더 들으려는 편이다.

나이를 먹고 소설가라는 직업을 지녔기 때문에 내가 젊을 때보다 사람을 더 예리하게 본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니 다른 분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 정도로는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를 먹고 소설가라는 직업을 지녔기 때문에 타인을 보는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고.

생각의 속도보다 깊이가 매력
지성·주관도 근육처럼 키워야
콘텐트 없음도 주름만큼 잘보여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나이를 먹으면서 상대의 외모에 덜 휘둘리게 됐다. 상대의 간판에도 영향을 덜 받는다. 이제 와서 미남미녀들이랑 내가 연애를 할 것도 아니고, 인상 안 좋지만 성실한 사람, 간판 좋지만 일 못 하는 사람들도 그간 꽤 만났다. 남이 걸친 옷이나 장신구에 대해서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무지하다.

대신 그만큼 상대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됐다. 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화술이나 목소리도 풍미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결국 흥미로운 생각을 품은 사람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생각을 품은 사람이 무척 드물다. 뻔한 생각을 하거나 별생각이 없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독특한 사람, 괴짜가 좋다는 말이 아니다. 특이한 취향을 가졌지만 그 취향에 대해 질문을 몇 번 던지다 보면 금세 밑천이 바닥나는 사람도 있다. “그냥요”나 “잘 모르겠어요”로 설명이 끝난다. 관심사라는 좁은 영토를 외부인의 눈으로 살핀 적이 없고, 몇몇 균열 지점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특이한 취향을 가졌고 동시에 별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상대가 해당 분야에 백과사전적인 지식이나 오타쿠 같은 열정을 지녔다고 해서 내 눈에 더 매력적으로 비치는 건 아니었다. 열정적인 괴짜구나 싶었을 뿐. 독특한 의견도 마찬가지다. 독특한 의견의 근거를 제 논리로 설명 못 하고 “유튜브에서 봤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끌리는 게 아니라 무서워진다.

반면 잡학에도 깊이를 담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내가 끝내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지만 경청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주제를 다양한 맥락에서 검토했고, 한 측면을 추상화하여 전혀 다른 범주에 있는 다른 사건과 유연하게 잇는 능력이 있으며, 메타인지도 확실한 사람들이다. 그런 지성과 주관에 경험까지 더해진 사람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소설가로서 나는 그런 이들을 “콘텐트가 있다”고 표현한다. 콘텐트가 있는 사람과 대화하면 재미있다. 대화만으로 뭔가를 배운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잠깐일지라도 덕분에 어떤 정신의 전망대에 올라 새로운 풍경을 즐기는 시원함을 맛본다. 편집자들은 그런 인물들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에세이 출간을 제안하곤 했다.

젊었을 때는 생각의 깊이보다 속도에, 완결성보다 경쾌함에 끌렸던 것 같다. 이제 순발력이나 발랄함에 지적인 흥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젊을 때 반짝반짝해 보였던 또래들을 모처럼 다시 만났는데 오가는 이야기들이 얄팍하고 껄렁해서 놀란 적이 여러 번 있다. 최악은 “우리 그때 재미있었지” 하면서 옛날얘기를 되풀이하는 부류다.

내 관찰로는 영리한 청년이었다가 내용물 흐릿한 중년이 된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영리함과 순발력으로 30대를 버틴 것이다. 정신의 어떤 부분을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것이다. 그 훈련은 근력 운동과 흡사하다. 어린아이의 몸을 보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20대도 어느 정도 그렇다. 하지만 40대는 체형을 보면 평소에 운동을 얼마나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티가 난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운동 부족이 몸의 병이 되어 돌아온다.

다른 경험들이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내게는 걷기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는 소리만큼 전망 없게 들린다. 한 업계에서 20년 정도 일하면 부장급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을 원하면 정신에 꾸준히 간접 체험과 지적 자극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독서 부족이 노년에 마음의 병을 일으킬 거라 믿는다. 삶이 얄팍해지는.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4050 책의 해’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1년에 한 권 이상 책을 읽었다는 사람의 비율이 20대에서는 78.1%, 30대는 68.8%였는데 40대는 49.9%, 50대는 35.7%에 불과했다. 중년들이여, 책을 읽자. 주름 제거 시술보다 시급하다. 콘텐트 부재도 주름만큼 훤히 보인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