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만파식적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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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설화로 만나는 최초의 고고학 답사기
경주 여행을 새롭게 즐기는 독창적인 스토리텔링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2 만파식적편》은 독자와 함께 여행하듯 견학과 산책을 역사에 접목시키는 황윤 작가의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9번째 책으로, 《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되어 있는 설화 만파식적을 주제로 선보이는 최초의 고고학 답사기다. 경주 곳곳을 직접 찾아가 그 역사적 의미를 최대한 추적하고 고증함으로써 독자에게 진정한 고고학의 묘미를 전한다.

지금까지 만파식적의 의미를 문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연구한 사례는 있었지만, 경주라는 공간에서 만파식적과 연관된 각각의 유물과 유적, 또 그것들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과 장면이라는 수많은 구슬을 꿰어 하나의 결과물로 선보인 적은 없었다. 황윤 작가만의 남다른 호기심과 삼국시대에 대한 깊은 애정이 아니었다면 결코 접할 수 없는 독창적인 역사 여행 아이템이라 하겠다.

설화를 역사적으로 고증한다는 것의 의미
《삼국사기》 vs 《삼국유사》
만파식적, 괴력난신(怪力亂神)인가 대업을 위한 신성한 사건인가

만파식적은 단군신화 정도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다. 만파식적 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고 치부했지만,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과거 영웅들의 신비한 일화를 일반 유학자들과는 달리 괴력난신으로 보지 않고 대업을 위한 신성한 사건으로 해석하여 세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오늘날 만파식적을 이해하는 데에 독보적인 사료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저자 황윤 또한 한반도 사람들이 왜 중국 신화에만 의미를 부여하며 중요하게 여기는지 반문하는 일연의 뜻을 좇아 아무리 괴력난신 표현이라 할지라도 이를 무시하지 않고 그 안에 숨어있는 의미를 최대한 추적해보고 재해석해보겠다는 의지로 역사 여행을 추진한다.

과연 만파식적은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는지,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단순히 괴력난신이라 무시할 수 있는지, 또는 역사의 한 조각으로 대해야 할 존재인지… 일연이 연구하던 시대에 비하여 풍부해진 사료들과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을 이어 기록한다.

경주에 머무는 용(龍)의 흔적들
지금도 울려퍼지는 삼한일통의 자부심

경주 여행 만파식적편은 인상파의 거장 모네의 ‘루앙대성당’ 연작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황홀한 바다와 바위 색을 연출하는 세계 초유의 수중릉 문무대왕릉에서 출발한다. 한반도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후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龍)이 되기를 자처한 문무대왕의 흔적은 설화인 듯 역사인 듯 오늘날까지 경주에 머문다.

1차 만파식적 설화 속에 등장하는 용, 그 후 효소왕대에 등장한 2차 만파식적, 그리고 성덕대왕신종의 용뉴에 묘사된 대나무와 용에 이르기까지 만파식적을 매개로 관통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용이 있고, 역사와 설화를 넘나들며 진지함과 재미라는 두 마리 용을 잡는다.

저자 황윤과 경주를 거닐다보면 설화 속에 묘사되는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 그리고 성덕대왕신종 등에 머물며, 경주를 감싸는 용의 스토리텔링과 조우하게 된다.

문무대왕릉에서 시작한 여행은 성덕대왕신종 앞에서 마무리되는데, 저자의 시선은 용과 대나무가 묘사되어있는 용뉴(龍紐)에 머문다. 황수영 박사(1918~2011년)는 만파식적 신화를 종에 디자인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두 다리를 앞뒤로 휘졌는 듯한 용의 모습과 음통에 새겨진 대나무는 만파식적에 등장하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신라인들은 종이 웅장한 소리로 울릴 때마다 문무왕의 업적을 생각하며 자신들이 이룩한 삼한일통에 대한 자부심을 되새겼을 것이며, 이는 죽어서도 호국대룡, 즉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자 한 문무왕의 유언이 현실로 이루어진 장면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서양 용을 더 자주 접하곤 하지만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용은 고귀한 대업을 품고 있으면서도 일상 곳곳에 존재했었고, 경주 도처에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까지도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빠져드는 고고학의 묘미
설화를 역사로 고증하는 즐거움

황윤과 함께하는 역사 여행의 묘미는 독자 스스로 고고학자가 된 듯 하나하나 살펴보고 비교 고증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만파식적 설화로부터 시작된 이번 여행에도 놓치면 아까운 포인트가 있다.

경주에 있는 왕릉의 주인이 뒤바뀐 이유

먼저 만파식적의 비밀을 풀어가는 와중에 찾아가는 신문왕릉과 효소왕릉이 조선 영조 때 잘못된 근거로 묘의 주인을 찾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지정되었다는 발견이 흥미롭다. 지금의 신문왕릉은 사료에 의하면 효소왕릉이고, 신문왕릉 또한 지금의 진평왕릉이라는 것. 이는 오랜 시간의 공력과 연구로 추적해낸 오직 황윤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경주 왕릉의 진짜 주인 찾기를 보여주는데, 고고학적 즐거움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만파식적에서 신문왕이 용을 만난 시점  682년 vs 690년

《삼국유사》에 따르면 동해에 등장한 작은 산에서 신문왕이 용을 만난 시점이 682년 또는 690년으로 나뉘고 있다. 즉 신문왕 즉위 직후냐 재위 거의 마지막 시점이냐로 구분된다. 이때 일연은 각기 다른 사료에 등장하는 두 시점을 모두 기록해둔 채 다만 690년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며 개인적 의견을 표기해두었다.

여기에 대해 저자 황윤은 만일 동해에 등장한 작은 산에서 용을 만난 시점을 신문왕 즉위 직후인 682년으로 본다면 태자는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6살에 불과하며, 학계 다수설이 신뢰하는 《삼국사기》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아예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이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정확히는 마이너스 5살이다.

반면 동해에 등장한 작은 산에서 용을 만난 시점을 신문왕 재위 말년인 690년으로 본다면 태자는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보면 14살이며 《삼국사기》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4살이다. 결국 만파식적에서 마치 성인처럼 묘사된 채 말을 타고 먼 거리에 있는 신문왕을 향해 달려와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편 태자인 만큼 690년이 아니라면 이야기의 성립 자체부터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나름 15살부터 성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자 나이와 연결되는 오류가 있기에 점차 “신문왕이 주인공인 682년 배경의 1차 만파식적 틀에다가 2차로 690년 배경으로 태자를 이야기에 새로이 추가시킨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품는다.

디자인의 변천으로 살피는 석탑을 보는 안목  
유물의 특징을 통해 당시의 외교정치력까지 살피다

이번 여행에서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직접 만나 석탑의 변천 과정과 그 특징들에 대해서 살펴본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대해 저자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산전수전 다 겪은 군복 입은 장군 느낌이라면,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비단 옷을 입은 사극 속 아이돌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감은사지 석탑을 시작으로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거친 후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그 이후 불국사 석가탑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 과정과 디자인적 변화 등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 탑을 보는 안목을 더해준다.

이 외에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금동 사리함과 그 속에 있던 불상에 대한 설명을 통해 예술적인 특징 뿐만 아니라 문무왕 시절 신라의 독자적인 외교와 정치력에 이르기까지 미루어 알아내는 과정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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