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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 구본웅, 힘찬 운필로 귀기 어린 친구 이상 그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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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호 26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1935년, 캔버스에 유채, 62x5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1935년, 캔버스에 유채, 62x5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72년 10월에 발행된 문학사상 창간호의 표지화는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의 그림 ‘친구의 초상’이었다. 야수파의 힘찬 운필에 실려 귀기를 뿜어내는 이상(1910~1937)의 압도적인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상을 빼고 우리 문학사를 논할 수가 없듯이 구본웅을 빼고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말하기가 힘들다. 두 천재는 서촌 배화여고 자리에 있었던 신명학교 동기다. 나이는 구본웅이 네 살 더 많으나 몸이 쇠약해 학교를 쉬어가며 다녔기에 이상과 졸업을 같이 하게 됐다. 신명학교 시절, 구본웅은 글씨를 잘 썼고 이상은 말을 잘했다.

구본웅의 집안은 예사롭지가 않다. 그의 부친은 4형제 중에서 셋째였다. 첫째는 군수를 지냈고 둘째는 대한제국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했다. 나중에 진명여고 교장을 했다. 셋째 구자혁(1885~1959)은 경남 창원우체사에서 관리로 일하다 전라도 옥구로 발령을 받은 후 곧바로 사표를 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전문부를 다녔다. 러일전쟁 전후의 일이다. 넷째 구자옥은 미국 스프링필드대에서 유학한 엘리트다. YMCA에서 총무로 일했고 해방 후 초대 경기지사를 지냈다. 구자혁은 적수공권으로 1만2000석 규모의 큰 재산을 모았다. 자식이라곤 구본웅이 유일했다. 불행히도 구본웅은 곱추였다.

작은 몸으로 큰 세상 품었던 천재

구본웅. [중앙포토]

구본웅. [중앙포토]

구본웅의 친모는 김씨다. 그러나 돌을 넘길 무렵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몇 년 후 부친이 변동숙(1890~1974)과 재혼했다. 구본웅은 계모와 함께 살았다. 변동숙은 거제도 사람이다. 서울에서 먼 거제도 사람과 인연이 맺어진 게 신기하다. 그녀는 거제도 출신이지만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았다. 변동숙에게는 26살이나 어린 이복동생이 있었다. 그가 변동림(1916~2004)이다. 변동림은 서울 출생이다. 그는 언니 변동숙의 집, 그러니까 구본웅의 집에서 살았다. 구본웅의 큰아들 구환모(1930~2005)가 덕수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의 가정교사를 했다. 변동림은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결혼을 한다. 이상은 친구의 이모와 결혼을 한 셈이 됐다. 이상과 변동림이 함께 산 건 몇 달에 불과하다. 1937년 4월 동경에서 이상이 객사했다.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했다. 그리고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꿨다. 구본웅, 이상, 김향안, 김환기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그대로 한국문화예술사다.

구본웅은 경신고보에 재학 중 YMCA에서 고희동에게서 회화를, 김복진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구본웅이 먼저 시도한 건 조각이었다.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조각 부문에서 ‘얼굴습작’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그러나 조각 작업을 지속하기에는 체력에 한계가 있었다. 조각에서 회화로 바꾸었다.

구본웅은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를 거쳐 1929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미학과에서 미학이론을 수학했다. 1933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 다닐 때 그는 사토미 가쓰조(里見勝蔵, 1895~1981)를 사사했다. 1921년 파리로 유학한 사토미는 마티스 등과 함께 야수파 운동에 참여했던 블라맹크(1876~1958)를 사사한 후 1925년에 귀국했다. 1929년 고향 교토를 떠난 사토미는 동경의 이오기(井荻)에 아틀리에를 지어 활동한다. 이오기는 도심에서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가 있던 니시닛포리에서도 꽤 먼 곳이었지만 구본웅은 여기까지 가서 그림을 공부했다. 구본웅은 거의 실시간으로 서구의 야수파를 접했다. 구본웅은 스승 사토미가 그러했듯 이과회(二科會)와 독립미술가협회에 출품하여 주목을 받았다.

구본웅의 친구 이상. [중앙포토]

구본웅의 친구 이상. [중앙포토]

한때 구본웅이 동경에서 다방을 경영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친 구자혁이 아들의 도쿄 유학생활 5년 동안 보낸 학자금이 쌀 2000석이었다. 10만원쯤 된다. 평균적인 월급쟁이의 한 달 월급이 30원 할 때다. 구본웅은 동경에다 큰 집을 구했다. 멋있게 실내장식한 공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 기계며 음향시설 등을 설치하고는 친구들을 불렀다. 친구들은 거기서 잠도 자고 공짜로 술과 커피를 마셨다. 밥도 지어서 먹었다. 구본웅이 집을 비워도 친구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유학생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다방으로 착각할 만했다.

일본에서 명성을 날리던 구본웅은 1931년 6월에 동아일보 사옥에서 개인전을 가져 그 명성을 서울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1933년에 학업을 마치고 완전히 서울로 돌아온 그해 4월에 지금의 명동 유네스코회관 근처에 있는 건물 2층을 빌려 경성정판사(京城精版社)를 개업했다. 9월에는 소공동 조선철도호텔(조선호텔) 맞은편에 골동품 갤러리 우고당(友古堂)을 열었다. 우고당 2층은 아틀리에로 여기서 이상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구본웅은 매일 낙랑팔라와 제비다방에 들러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문인들과 친교가 깊었다. 이상, 박태원,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김유정 등 구인회 멤버가 1936년 3월 창간한 잡지 ‘시와 소설’은 창문사에서 발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구본웅이었다. 구본웅이 표지와 장정을 맡고 이상이 편집을 맡았다. 창문사는 1934년 9월 월남 이상재가 경영하던 ‘주식회사 조선기독교 창문사(彰文社)’를 구본웅의 부친 구자혁이 인수하여 설립한 출판사 겸 인쇄소였다. 이 무렵 구본웅의 곁에는 늘 이상이 있었다. 1937년, 이상이 동경으로 떠나면서 이 둘은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2차대전의 막바지에 서울에도 소개령이 떨어졌다. 1943년 혹은 1944년에 구본웅의 가족들은 수원으로 이사했다. 400평 대지의 반을 기역자 한옥이 차지했다. 거기에 우고당의 골동품과 구본웅이 그린 대작들이 수십점 있었다. 문양이 궁금했던지 기왓장을 석고로 뜬 게 백여점 마당에 널려 있었다.

구본웅은 세시풍속에 관한 시화첩 허둔기(虛屯記)를 남겼다. 서구의 문물에 열망한 모더니스트로만 알려진 구본웅이지만 허둔기에서는 조선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관심과 통찰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골동갱(骨董羹, 신선로), 만두, 송편, 빈대떡, 참외, 수박, 김, 김치 등의 주제로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도 다루었다. “무우, 배추, 파, 마늘, 갓, 미나리, 고초, 생강. 그리고 청각, 배, 전복과 낙지도 넣을 것이오, 젓국으로 조기젓, 멸치젓, 굴과 꿀도 치레만은 아닐 것이다. 일 년의 반 양식이라 집집이 야단. 김장 고명에는 안 들어가는 것이 없다지만 실백자, 생율 그리고 해삼, 전복은 좀 과한 치레라 하겠다.” 김치에 관한 글에서 그의 세련된 미각이 돋보인다. 변동숙은 생전에 거제 친척들에게 부탁하여 대구 등 반건조생선을 서울로 올려보냈다. 구본웅 식구들은 생선에는 풍족했다.

발레리나 강수진, 구본웅의 외손녀

‘이건희 컬렉션:영원한 유산’에서 공개된 구본웅 ‘정물’. [중앙포토]

‘이건희 컬렉션:영원한 유산’에서 공개된 구본웅 ‘정물’. [중앙포토]

한국전쟁이 났다. 구본웅을 잘 아는 육군 대령이 구본웅의 큰아들에게 연락했다. 구본웅은 큰아들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대령이 주선한 배를 타고 인천에서 마산으로 갔다. 대령은 그들을 배려했다. 그러나 일행 전체가 신세를 지기에는 무리였다. 구본웅만 마산에 남았다. 금수저 출신의 구본웅이었지만 돈을 벌어야 했다. 구본웅은 춘화를 그려 미군들에게 팔았다. 어릴 때부터 서예에 능했던 구본웅은 모필에 익숙했다. 빠른 필속의 동양화풍의 운필이 춘화와 잘 맞아떨어졌다. 제법 팔렸다. 그 돈으로 숙식을 해결해가며 몇 달간 마산 무학산 언덕에서 지냈다. 그 사이 수원의 집은 폭격을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그림도 골동품도 다 사라졌다. 피란 중에도 둘둘 말아서 애지중지 들고 다닌 그림들이 있었다. 그 하나가 ‘친구의 초상’이다. 1952년, 구본웅이 죽고서 그림 한장이 펼쳐졌다. 그림을 본 구자혁이 ‘해경이네’라고 신음하듯 외쳤다. 김해경은 이상의 본명이다. 얼마 남지 않은 구본웅의 그림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의 집에 산재했다. 1954년 천일화랑에서 김중현, 구본웅, 이인성 ‘유작삼인전’을 할 때 비로소 먼지를 털고 한군데에 모여 모습을 드러내었다.

구본웅은 작은 몸으로 큰 세상을 품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무인 혈통으로 골격이 컸다. 큰 몸짓으로 큰 세상을 품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구본웅의 외손녀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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