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지금 글로벌 경제를 규정짓는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미∙중 산업 경쟁이다. 반도체, 배터리, AI …. 미국은 첨단 산업 분야 글로벌 공급망에서 기어코 중국을 밀어내려고 한다. 그럴수록 중국은 더 치열한 기술 자립 전략으로 맞선다.
항공기 제작 분야도 다르지 않다. 그 현장으로 가보자.
비행기 외교
세계 항공기 시장은 미국의 보잉과 유럽(본사 프랑스)의 에어버스가 양분하고 있다. 전형적인 듀오폴리(duopoly) 시장이다.
두 회사가 가장 눈독을 들이는 시장이 중국이다. 에어버스는 앞으로 20년 동안 중국의 새 항공기 수요가 8420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대략 한 해 420대를 들여와야 하는 셈이다. ‘너 아니면 나’의 게임. 보잉과 에어버스는 ‘꿀 시장’을 두고 침을 질질 흘린다.
중국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나온 게 ‘비행기 외교’다. 미국이 예쁘다 싶으면 보잉기 하나 사주고, 유럽이 예쁘다 싶으면 에어버스 한 대 더 사주는 식이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중국에 갔다. ‘비행기 외교’는 역시 빛을 발한다. 마크롱은 이번 방중으로 에어버스 160대를 챙겼다. 대략 26조 원 규모란다.
먹었으니 갚아야 한다. ‘대만 문제와 관련, 최악의 상황은 유럽이 미국의 장단에 맞춰 추종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마크롱 발언이 그래서 나왔다. ‘중국과의 공급망 단절이나 디커플링(decoupling)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도 내놨다.
비행기가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전선에 균열음을 남긴다.

사진 셔터스톡
C919
중국이 글로벌 항공기 제작 업계의 ‘듀오폴리’ 체제에 도전장을 내민 건 2006년이다. 국무원(정부) 산하에 ‘대형 비행기 제작 소조’를 만들고, 시행 회사로 ‘中國商用飛機(중국상용비행기)'’를 발족했다. 줄여서 ‘中國商飛(중궈샹페이)’, 영어 이름은 ‘COMAC(Commercial Aircraft Coporation of China)’이다.
말이 항공기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중국의 전략은 뻔하다.
‘시장으로 기술을 바꾼다(以市场换技术).’
‘시장 줄 게 기술 다오’ 식이다. ‘시장을 미끼로 기술을 끌어들인다’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먼저 미끼를 문 건 역시 유럽 에어버스였다. ‘보잉보다 더 사줄게….’, 에어버스는 그 말에 2008년 톈진(天津)에 에어버스 공장을 지어 가동한다. 꿀 시장 중국에서 경쟁사 보잉을 밀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여겼다.
COMAC은 설립과 함께 중형 항공기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델명 ‘C919’. 좌석 158~192석의 중형으로 A320과 보잉737과 동급이다.
에어버스 톈진 공장은 좋은 ‘커닝’ 대상이었다. COMAC은 톈진에서 디테일을 배웠다. 중국이 톈진에 조성한 항공 단지에 하나둘 기술이 축적됐고, 기술은 COMAC으로 흘러들었다.
서방의 업계 전문가들은 ‘설마….’ 했다. 비행기를 개발한다는 게 무슨 성능 좋은 자전거를 만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해냈다. COMAC는 2017년 시험 제작기가 처음으로 C919 비행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시장 줄게 기술 다오’ 전략 10여 년 만이다.

2017년 모습을 드러낸 중국 제조 대형 여객기 C919. 신화통신
승객을 실어 나를 날이 머지않았다. COMAC은 지난해 말 상하이 동방항공(東方航空)에 C919 한 대를 인도했다. 물론 상용 비행을 위한 최종 절차인 감항 인증(Airworthiness Certification, 항공기의 안전 비행 성능 인정)을 통과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동방항공의 C919는 시험 비행 중이다. 올해 상용에 투입될 것으로 중국 언론은 전하고 있다. 반신반의했던 업계 전문가들도 이제 C919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ABC 구도!’ 중국은 이렇게 외친다. 글로벌 항공시장이 이제는 A(Airbus), B(Boeing), 그리고 C(Comac)로 재편될 것이라는 얘기다. 듀오폴리에서 트리폴리(tripoly)로 바뀌는 모양새다. 중국은 그렇게 제조업 대국에서 강국으로의 비상을 꿈꾼다.
최종 승자는 누구?
에어버스 565대, 보잉 116대, C919 305대…. 지난해 말 현재 3개 항공제작 회사가 손에 쥐고 있는 중국 주문 물량이다. 에어버스가 월등히 많고, COMAC이 그다음, 보잉이 꼴찌다. 이러다가는 ‘꿀 시장’ 중국을 에어버스에 다 빼앗길 판이다.
여기가 끝일까.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비행기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중국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핵심 기술을 여전히 미국과 유럽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래 사진은 이를 보여준다(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그래픽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가장 중요한 부품은 역시 엔진이다. COMAC은 CFM이라는 회사의 엔진을 들여와 쓴다. CFM은 미국 GE와 프랑스의 엔진 제작 업체인 사프란(Safran)이 함께 만든 엔진 전문 업체다. 결국 C919는 핵심 부품을 미국과 프랑스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중국 항공기 제작에 ‘태클’을 걸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COMAC을 군부와 관련성이 깊다며 블랙리스트에 올려놨다. COMAC에 대한 엔진 및 전자항공유도장치 수출을 신고제로 바꿨다. 항공기 엔진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AECC(중국항공엔진그룹)도 같은 이유로 관찰 대상에 올려놨다. 중국 항공기 제작에 목을 쥐고 있겠다는 계산이다.
미국의 벽은 높다. 중국 항공업계 전설로 통하는 장엔종 중국과학원 원사는 “엔진 독자 개발에 적어도 15년, 길게는 2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이 마음먹고 항공기 엔진의 대중국 수출 조치를 내린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DSL이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봉쇄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2025년 자국 신규 항공수요의 10%를 따내겠다는 COMAC의 기대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중국은 결코 보잉을 무시할 수 없다. 핵심 기술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 준다.
중국의 항공기 산업 발전을 억제하려는 미국, 그 틈을 비집고 시장을 확대하려는 유럽, 그리고 비행기 자립을 꿈꾸는 중국…. 이들이 벌이는 게임은 진행 중이다.
어디 항공기뿐이랴. 반도체 분야도, 배터리 산업에서도, AI 영역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 게임에 우리도 휩쓸려 들어가는 판국이다. 항공기 제작에 얽힌 글로벌 게임을 연구해야 할 이유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