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선 넘는 정치, 방관하는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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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한번 상상해보자. 만약 기준금리를 결정할 권한을 국회가 갖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금리는 늘 적정 수준을 밑돌고 경제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빠질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자질이나 판단력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보다 못해서가 아니다. 당장의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게 정치인이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 금리 인상을 피하고 싶어할 유인이 크다. 정무적 유불리를 따지다 결국 어떤 결정도 못 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일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결국 금리라는 정책 시그널이 망가지면서 시장은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질 것이다. 기준금리 결정을 정부에서조차 독립된 금통위에 맡긴 이유다.

그런데 지금 유사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금리만큼이나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큰 전기요금 얘기다. 정부와 여당이 2분기 요금 인상안을 보류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은 오리무중이다.

전기요금 한달째 표류하는데
“여당이 최종 판단” 손 놓아
금리 결정을 국회에 맡긴 격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여당이다.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지난 3월 말 당정협의 뒤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확인했다”면서도“에너지 가격 변동 추이와 인상 변수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전문가 좌담회 등 여론 수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름값이 내려갈 여지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유가는 다시 오름세를 탔다. 석유 수출국들이 감산을 발표하면서다. 그러자 여당에선 한전이 먼저 ‘뼈를 깎는 자구책’부터 내놔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국민에 부담을 지우려면 최소한의 ‘성의 표시’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의미다. 한전 정승일 사장은 20조원 규모의 자구안을 내겠다고 했지만, 여당의 기류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신 또 다른 전제조건이 붙었다. 정 사장의 자진 사퇴다.

한전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문재인 정부 이래 극심해진 에너지 정책의 타락에 한전의 책임도 작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기 잡기’에 한 달을 허비하고 있을 만큼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는 게 문제다. 원가의 70% 수준의 전기요금에 지금 이 순간에도 한전의 적자는 차곡차곡 폭탄처럼 쌓이고 있다. 돈이 떨어진 한전이 송배전망 투자를 급격히 줄이면서 이제는 전력 공급의 안정성까지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무엇보다 여당이 사실상 전기요금의 인상 시기와 폭을 결정하겠다고 나선 건 선을 한참 넘은 일이다. 관련 법은 한전이 짠 요금 조정안을 전기위원회가 심의하고,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인가 여부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어디에도 여당이 전기요금을 결정한다는 내용은 없다. 당정협의는 정책 입안 과정에 민의를 반영하고, 국회와의 충돌을 막아 정치 시스템을 안정시키기 위한 관례상의 절차일 뿐이다.

법이 정부의 권한을 명시한 건 그 책임도 오롯이 지라는 의미다. 하지만 당정협의 이후 주무부처인 산업부 이창양 장관은 전기요금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아예 “최종적으로 당에서 판단할 부분”이라며 손을 놓았다. 여당의 반대를 핑계 삼아 애써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결정이 늦어지는 사이 결국 정부가 뒷수습해야 할 후유증도 커지고 있다. 여당이 직접 등판하면서 한국이 전기를 많이 쓰는 산업에 사실상 보조금을 주고 있다는 의혹 제기에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최근 미국은 이런 이유를 들어 한국산 철강제품에 상계관세를 매기겠다고 나섰다.

‘선 넘는 정치’의 근저에는 이처럼 장관과 부처의 직무유기가 있다. 전기요금 포퓰리즘이 본격화한 지난 정부 때부터 그랬다. 대통령의 무책임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무분별한 정치 논리의 개입을 막지 못한 부처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 새 정부 출범 당시 전기위원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한은 금통위 수준으로 강화해 실질적인 요금 결정 권한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이 바뀐다고 나아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면 서둘러 제도적 해법을 찾는 게 맞다. 그렇다고 까다로운 결정을 위원회에 맡겨 놓은 채 수수방관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선의로 포장된 포퓰리즘의 범람을 견제할 1차 책임은 여전히 장관에게 있다. 최근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장관도 있었다. 전세 사기 피해를 정부가 먼저 보상해주라는 야권의 요구에 “안타깝지만, 선을 넘어선 안 된다”며 원칙을 분명히 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그랬다. 정치가 선을 넘게 하지 않으려면 정부가 명확한 선부터 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