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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90년 만의 달러 공급 급감…인플레보다 신용경색 걱정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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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경제성장률 등 주요 지표가 발표된 지난달 마지막 주에 의미심장한 데이터가 공개됐다. 올해 3월치 미국 통화 공급량(M2)이다. 한 해 전과 견줘 4.05% 줄었다. 지난해 12월 이후 넉 달째 마이너스 행진이다.

미국 M2에는 현금과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예금뿐 아니라 저축성 예금과 머니마켓펀드(MMF), 10만 달러 이하의 정기예금 등이 포함된다.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이뤄진 ‘달러 공급(dollar supply)’이다. M2는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 기간에도 늘었다. “지금 경제 분석가나 투자자, 비즈니스 리더 가운데 M2가 줄어든 경험을 한 사람은 없다”고 프랑스 인시아드대 안토니오 파타스(경제학) 교수가 최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할 정도였다. 실제 미 M2 증가율 -4.05%는 1933년 12월 말(-8.06%) 이후 약 90년 만에 최대 감소 폭이다.

올 3월 총통화 마이너스 4%
1933년 이후 최대폭으로 줄어
지속적 금리인상의 여파인가
시중은행들 시름도 더 깊어져

가장 큰 원인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긴축이다. Fed는 2022년 3월 이후 1년 정도 만에 기준금리를 4.75%포인트나 올렸다. 양적 긴축(QT)도 단행해 시중은행들이 달러를 공격적으로 흡수했다. 올해 들어서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 시중은행 위기가 작용했다.

급격히 멈춰버린 ‘달러 창출엔진’

앨런 사이나이

앨런 사이나이

요즘 달러는 불안한 중소 은행의 예금계좌에서 빠져나가 MMF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자금이 단기 부동자금으로 돌변하고 있다는 얘기다. 돈이 빠져나가자 시중은행 경영자들은 대출 조건을 강화하며 자금공급을 줄이기 시작했다. 달러를 창출하는(money creating) 엔진이 정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공황 이후 수십 차례 엄습한 침체나 위기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M2는 월가의 이코노미스트들 사이에선 사실상 ‘잊힌 지표’다. 월가가 가장 정확한 경기예측가로 꼽는 앨런 사이나이 디시전이코노믹스 대표는 지난해 말까지 M2 증가나 감소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당시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M2의 증가 또는 감소로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 등을 예측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근거는 시중은행의 자금 조달 방식이 20세기 후반 이후 획기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요즘 시중은행은 예금 대신 예탁증서(CD)를 발행하는 등으로 ‘돈을 사들여 빌려주고 있다’.

스티브 행키

스티브 행키

지금까지 M2는 ‘모든 물가와 성장은 통화량에 달렸다’고 믿는 통화주의자(monetarist)들이나 중시하는 지표였다. 이들은 미 경제학계 소수파다. 대표적인 통화주의자는 존스홉킨스대 스티브 행키 교수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인 1980년대 백악관에서 경제보좌관으로 활동했다.

평소 행키 교수는 ‘인플레이션 타깃+실질 성장률 평균-화폐 유통 속도’라는 황금률(Golden Rule)에 따라 M2 증가율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덧셈과 뺄셈식에 의하면 미국의 M2 증가율은 연 3% 남짓이다. 2023년 3월치인 -4.09%는 황금률의 적정치보다 훨씬 낮다.

업무용 빌딩값 추락 주목해야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두 전문가와 같은 날 전화 인터뷰를 했다. 바로 Fed가 3월치 M2 증가율을 발표한 직후인 지난달 27일이었다. 행키 교수는 평소 지론대로 M2 급감이 물가와 성장률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이나이 대표는 평소와 다른 말을 했다. “최근 은행 파산과 달러의 대이동 때문에 M2가 다시 주목해야 할 지표가 됐다”고 했다. M2 증가율이 90년 만에 급감한 급락하는 이례적인 사건 때문에 ‘잊힌 지표’가 부활한 셈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일반적으로 미국 M2 증감과 뉴욕 주가 사이에는 1~9개월 정도 시차가 발생한다. 실물 경제와 사이에는 6~18개월, 물가와 사이에는 12~24개월 정도 시차가 있다. 행키 교수는 “M2는 2022년 7월 21조7000억 달러 선에 이른 뒤 줄어들기 시작했다”며 “M2가 감소하기 시작한 지 9개월 정도 지났기 때문에 실물경제에서 침체 조짐이 나타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사이나이 대표와 행키 교수는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률 하락을 우려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신용경색과 금융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고하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이 지목한 발화 지점은 업무용 부동산(CRE) 시장이다.

이미 미 업무용부동산 가격은 올해 1분기 금리 상승과 대출 감소 때문에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 바람에 세계적인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의 실적이 급감했다. 이처럼 피로 증상을 보인 업무용부동산 시장은 은행 대출 등이 더 줄면(M2의 추가 감소)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Fed 오락가락 정책이 화근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미 업무용부동산 시장은 2020년 이후 중소 시중은행이 경쟁적으로 돈을 대출해준 곳이다. 요즘 중소은행들이 파산의 벼랑 끝에서 대출을 억제하고 있다. 앞서 막대한 자금을 공급한 업무용부동산 값을 더욱 떨어뜨려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악순환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중소은행의 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Fed와 미 예금보험공사(FDIC) 등은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예금이탈과 주가 폭락으로 궁지에 몰린 중소은행 퍼스트리퍼블릭을 대형 은행에 넘기는 작업에도 적극적이다. 2008년 봄 위기에 빠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를 다른 투자은행에 반강제로 흡수시킨 사건이 떠오른다.

Fed의 희망대로 위기의 중소은행을 흡수합병시킨다고 달러가 제대로 돌지 의문이다. 행키 교수는 “제롬 파월 등 Fed 내부자들이 인플레이션을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했다가 갑자기 인플레 파이팅으로 돌변하는 바람에 시중은행이 받을 충격을 살피지 못했다”며 “그 바람에 신용창출 엔진이 예전의 기준금리 인상보다 더 위축돼 M2가 90년 만에 급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