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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의대 광풍 뒤의 불편한 진실

중앙일보

입력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달 초 벌어진 서울 대치동 마약 음료 사건은 마약과 보이스피싱을 결합한 신종 사기 수법이라는 측면에서 충격적이었다. 범죄 대상과 장소는 더 찜찜하다. 중국 범죄조직이 우리 사회의 취약한 지점인 비이성적 교육열을 제대로 파고든 것 같아 하는 얘기다. 마약 탄 음료엔 '메가 ADHD'라는 조악한 라벨이 붙어 있었는데, 이들 일당은 대치동 학원가에서 무작위로 마주친 어린 학생들에게 "집중력 향상과 기억력 강화를 돕는다"며 유혹했다. 진짜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환자도 의사 처방이 있어야 치료제를 먹을 수 있는데 이와 무관한 학생들이 별다른 거리낌 없이 ADHD 이름이 붙은 음료를 받아마실 거라는 걸 일당은 잘 알고 있었다. 공부 잘하게 만들어준다며 일부 대치동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이 약을 먹여온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말이다.

성적 올린다며 약 먹이는 부모
정신병동서 문제집 푸는 아이
마약조직의 먹잇감 된 교육열

 실제로 지난해 국감에선 강남·송파·서초구 순으로 ADHD약을 많이 처방받았을뿐더러 강남 3구의 처방 인원 역시 급증하는 추세라는 자료가 나왔다. 지난 2014년 '강남 엄마의 공부 알약…정체는 ADHD 치료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날 만큼 부모의 과도한 교육열이 청소년 약물 오남용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수차례 나왔는데 지난 10년 동안 문제 해결은커녕 거꾸로 범죄조직의 먹잇감이 될 만큼 더 만연해진 셈이다.

 몇 년 전 자살 충동 등으로 분당서울대병원 정신병동에 한 달쯤 입원했던 한 청년의 경험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놀라웠던 건 같이 입원했던 중고생 환자들이 병실에서도 주요 과목 문제집을 풀고 있더라는 목격담이었다. 어디 출신이고 무슨 연유로 입원했는지 자세한 속내는 알 수 없기에 일반화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정신과 집중 치료 와중에도 부모가 원하는 좋은 대학 가겠다고 정신병동에서 문제집 푸는 장면은 대한민국 중고생들이 부모의 과도한 기대를 충족시키느라 비상식적인 공부 압박에 시달리는 현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는데 여기엔 의대 광풍이 일조하고 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유행한다는 초등학교 4학년 대상 의대 입시반 기사가 올 초 탄식을 자아낸 적이 있다. 사실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초4 인생 결정론' 식의 공포 마케팅이 횡행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벌써 20년 전인 2004년 『평생 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는 책이 출간됐을 정도다. 『특목고 초등 4학년 성적이 결정한다』(2010)거나 『초등 4학년 공부뇌가 일류대를 결정한다』(2012) 등 학부모들의 목표가 서울대나 특목고에서 의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과거보다 더 큰 우려를 자아내는 건 초4 정도가 아니라 유아 대상 의대 설명회가 열릴 만큼 의대 준비 연령대가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아이 적성과 무관하게 부모 희망에 따라 의대로 몰리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아져서다. "자녀의 안정적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는 부모들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부모 욕심, 그러니까 자식의 의대 진학을 자신들이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트로피로 여겨 아이들을 재수, 삼수도 모자라 n수로 떠미는 부모도 적지 않다.

 적성 불문, 성적 잘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에 등 떠밀려 간 의대생이 과연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사명감을 갖고 환자를 돌보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까. 긍정적 답을 하긴 쉽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온 사회가 의사를 선망하면서도 정작 의사에 대한 존경은커녕 존중도 없다. 아마 '의사들은 돈만 밝힌다'는 통념이 작용하기 때문일 텐데, 그렇게 욕먹는 기성세대 의사들조차 만나면 요즘 젊은 의사들 걱정을 한다. 의사가 보기에도 환자 대신 돈에만 진심인 의사가 요즘 너무 많단다. 소아청소년과나 산부인과 등 힘들기만 하고 상대적으로 돈은 적게 버는 필수의료에 안 가는 정도가 아니라, 의사 면허증만 딴 후 병원에서 수련 없이 개업하는 의사 비중이 점점 느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좋은 의사를 배출하는 환경은 점점 요원해지고 있는데 연구 실적마저 실망스럽다. 이미 10~20년 전부터 최상위 성적 학생만 의대에 갔다. 당연히 의대 수준이 높아졌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지난달 발표된 전 세계 의대 순위(영국 QS)에서 100위 안에 든 곳은 서울대가 유일했다. 전국 의대를 한 바퀴 다 돈 후 들어간다는 서울공대(화학공학과)가 같은 기관 조사에서 세계 17위인 것과 대조적이다.

 지금 입시 전쟁의 최상위 승자가 의대 진학이라는데, 그 의대조차 현실은 이 지경이다. 그저 암울할 따름이다.

글=안혜리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