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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의 위인 대신 인간이 보이는 과학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7호 20면

휘어진 시대 1~3

휘어진 시대 1~3

휘어진 시대 1~3
남영 지음
궁리

20세기 전반은 과학사에서 가장 빠르고 극적인 진보를 이룬 시대로 평가된다. 이 책은 그 뼈대에 해당하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과 현대 원자이론을 만든 과학자들이 살았던 시대상과 삶의 궤적을 세 권에 그린다. 지은이는 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교수로 2010년부터 과학사를 강의해왔다.

과학사를 다룬 책이지만, ‘어려운’ 과학이나 칭송 일변도의 업적 나열이 아니라 이를 이룬 과학자들의 삶과 고민을 중심에 뒀다. 예로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를 다루면서 남편 피에르 퀴리의 애제자 폴 랑주뱅을 거론한다. 랑주뱅은 퀴리 부인과 연인 사이였다는 주장이 있다.

지은이는 “단호하게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는, 많은 애매한 정황이 있었다”면서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며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돌렸다. 물론 랑주뱅은 이를 부인했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에 모인 과학자들. 가장 앞줄 가운데에 보이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마리 퀴리, 플랑크, 보어,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슈뢰딩거 등 엄청난 과학자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것으로 유명한 사진이다. [사진 궁리]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에 모인 과학자들. 가장 앞줄 가운데에 보이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마리 퀴리, 플랑크, 보어,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슈뢰딩거 등 엄청난 과학자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것으로 유명한 사진이다. [사진 궁리]

랑주뱅은 퀴리 부부와 끈질기게 인연을 이어갔다. 퀴리의 딸인 이렌과 그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퀴리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 합성’으로 1935년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랑주뱅의 손자는 퀴리의 외손녀와 결혼했다. 두 사람 모두 핵물리학자로, 퀴리-졸리오-랑주뱅의 과학자 집안 계보를 이어갔다.

이처럼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아야만 과학자가 되는 건 아니다. ‘독일과학의 아버지’ 막스 플랑크는 유품이 거의 없다. 1944년 연합군 폭격으로 집이 전소했기 때문. 그래도 김나지움(중등교육기관) 시절 한 번도 수석을 하지 못했다는 기록은 남았다. 뮌헨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자연과학이 아닌 (당시 인기 학문인) 인문학을 계속 공부하라는 교수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신의 가치와 일치하는 물리학으로 갈아탔고 최우등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 양자화된 에너지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보수적 인물이었지만 과학, 특히 양자물리학에서 혁신의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엑스선을 발견해 1901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지금으로 치면 고교 퇴학생이었다. 어려서 부모와 이주한 네덜란드에서 김나지움을 다니던 중 선생님의 불경한 초상화를 그린 친구의 이름을 함구하다 쫓겨났고, 졸업장 없이도 진학할 수 있었던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공대(ETH)로 향했다.

ETH는 독일에서 군대식 학교교육과 유대인 차별에 지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발견하고 받아들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ETH가 노벨상 22명, 필즈상(수학) 2명, 프리츠커상(건축) 3명, 튜링상(컴퓨터) 1명 등의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의 교육이 학생의 재능과 장래를 고민하는 대신 낡은 원칙과 규정에 얽매인 게 아닌지 살필 때 단골로 등장하는 사례다.

과학자도 노년에 신경 써야 한다. 새로운 원자론을 발견한 공로로 1933년 에르빈 슈뢰딩거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영국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은 67세였던 1969년 케임브리지대에서 미국내 랭킹 83위인 플로리다 주립대로 옮겼다. 많은 사람이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플로리다 주립대 교수 중 나이를 이유로 그의 임용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과장은 “디랙이 물리학과에 오는 것은 영문학과에 셰익스피어가 오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말로 반대를 잠재웠다. 디랙이 물러난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자리는 그 유명한 스티븐 호킹이 물려받았다.

1954년 ‘양자역학, 특히 파동 함수의 통계적 해석에 대한 기초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론물리학자·수학자 막스 보른도 비슷한 경우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인 그는 나치가 집권하면서 대학교수에서 쫓겨났다. 영국으로 피신한 그는 케임브리지대와 에든버러대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다 영국 국적을 얻었다. 1953년 정년퇴임하면서 받은 헌정논문집에는 그의 통계적 해석에 반론을 제기한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등 네 명의 논문도 함께 실렸다. 과학자들이 어떻게 엄밀성을 유지하고 토론과 검증을 통해 발전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보른은 정년 뒤 후한 보수를 주는 괴텡겐대 교수로 독일에 돌아갔다. 전후 최악의 상황에서도, 학문의 최고봉에 도달한 사람들을 예우한 독일의 모습이 눈에 띈다. 같은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은 그에 대해 ‘우리 동족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으로 실망을 드러냈다. 과학자도 역사와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며, 다양한 사고와 판단 기준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함께 살펴볼 과학자는 미국 출신의 유대인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맨해튼 계획을 주도해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1950년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다 공직에서 축출됐다. 과학자의 양심과 공동체의 운명과 관련한 철학적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일화다. 과학자들은 연구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도 또 다른 역사를 만들었다.

세 권은 각각 ‘원자시대의 시작과 상대성이론의 탄생’ ‘양자역학의 성립과 과학낙원의 해체’ ‘원자폭탄의 출현과 거대과학의 시대’로 이뤄졌다. 생생한 일화와 풍부한 시각 자료가 돋보인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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