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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중국·필리핀·베트남 넘나들며 한국인 표적 범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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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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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활보하는 사이버도박·보이스피싱·마약 범죄단〉

관리 대상 조폭, 중국에서 작당

#1. 윤희근 경찰청장이 지난 20일 중국 공안부에 친서를 보냈다.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벌어진 ‘마약 음료’ 사건 주범들 검거에 협조해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고위 간부 회의에선 경찰 지휘부의 중국 방문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2.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달까지 국내로 송환된 해외 보이스피싱 사범은 112명으로 요청 인원(477명)의 23.5%에 그쳤다. 경찰은 보이스피싱 사범에 대해 인터폴 적색수배를 요청해왔지만, 송환율은 저조하다.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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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장이 중국 공안부에 친서까지
 중국과 베트남·필리핀으로 건너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보이스피싱·사이버도박·마약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다. 급기야 경찰청장이 중국에 친서까지 보냈으나 “일회용일 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 전직 수사전문가는 “이번 사건은 공안부가 도와줄지 몰라도 중국을 근거지로 한 한국인 대상 범죄의 규모를 고려하면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수사 전문가들은 “한국 피해자의 돈을 해당 국가로 빼간다는 점에서 현지 공안 당국의 수사 의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진단한다. “중국 공안 등은 마음만 먹으면 금세 체포할 만큼 관할 범죄 정보를 훤히 파악하고 있지만 협조를 안 해준다”는 것이다.
 한국의 범죄자들이 해외로 건너가 근거지를 구축하고 한국에서 가담자를 모집해 범행에 나서는 수법을 추적했다. 경찰이 검거한 사이버 도박 수사 과정에서 이들의 교활함과 수사의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구인광고에 속은 사람들 많아
 ◇중국·필리핀·베트남 오가며 범행=경찰 관리 대상인 서울의 한 폭력조직 구성원 A씨 등이 해외를 거점으로 사이버 도박 범죄를 도모한 것은 2015년. 음란물 사이트에 연루됐던 개발자 B씨가 합류했다. 중국을 근거지로 한국에서 취업자를 유인했다. “중국의 무역회사에서 일한다”는 구인광고에 속은 구직자들은 필리핀과 베트남 등지를 아지트로 삼은 범죄에 가담하게 됐다.
 헬스 트레이너로 일하던 C씨는 “중국에서 일할 기회를 주겠다”는 고객의 말에 속아 웨이하이로 건너갔다. 몇 개월 뒤 그는 필리핀 마닐라로 이동했고, 이후 중국 칭다오로 옮겼다. “무역 관련 일”이라던 설명과 달리 사이버 카지노 이용자를 승인하는 업무를 줬다.
 서울 소재 대학을 휴학 중이던 D씨는 친구 얘기를 듣고 중국 칭다오 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중국에 도착하니 H아파트 18층 사무실로 데려갔다”며 “컴퓨터 세 대를 설치해두고 12시간씩 하루 2교대로 근무를 했다”고 말했다.
 E씨는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중국 화장품 무역업체’에 지원했다가 공범이 됐다. 웨이하이로 간 그는 3층짜리 단독 주택에 마련된 온라인 카지노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다.
 범죄 조직은 중국에 찾아온 구직자들에게 “정식 라이선스를 받은 합법 업체”라고 속였다. E씨는 “우리나라도 강원도 정선에 공식 카지노가 있으니 그런 줄 알았다”고 말했다.
 주범인 조폭 출신 A씨와 개발자 출신 B씨는 베트남을 오가며 활동한다는 게 관련자들의 진술이다. 이들이 새로운 도박 사이트를 계속 띄우고 참여자가 늘면서 5년 새 유입 자금이 1조원에 육박했다. 그러나 현지 공안 당국의 손길은 미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담자들이 잡히고 중국 현지에서 이탈한 일부가 경찰에 자수하면서 범죄의 윤곽이 드러났다.

수사망 피해가는 점조직 형태

 ◇개발자·디자이너는 한국에=중국을 근거지로 삼았지만, 도박 프로그램 개발팀은 한국에서 물색했다. 위챗 메신저로 소통하면서 중국·베트남·필리핀·한국의 실시간으로 협업 체제를 운영했다.
 2004년부터 프로그래머로 일해온 F씨가 마수에 걸렸다. 2017년 경북 지역에서 창업한 그에게 지인을 통해 접근했다. F씨는 카지노 사이트의 도메인을 구매하고 도박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홈페이지 디자인도 담당했다. 업체 직원인 디자이너 G씨와 개발자 H씨도 말려 들어갔다. 디자이너가 카지노 홈페이지를 꾸미며 받은 월급은 고작 100만원 정도였다. 개발자는 월 150만원 정도 받았다.
“한국돈 빼가 현지 수사 미온적”

 ◇수사 나서자 꼬리 자르기=경찰이 사이버 카지노를 포착해 국내에 있는 도박 참가자와 개발업체 등을 수사하자 주범들은 꼬리 자르기에 들어간다. 경찰 수사 선상에 오른 사람들에게 지침을 줬다.

 중국 황다오 지역 아파트에서 일했던 I씨는 “체포되기 직전 B씨와 통화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B씨에게 전화하자 ‘사장(A씨)은 본 적이 없고 나는 컴퓨터 고치는 일만 했다고 진술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F씨는 “B씨가 ‘카지노 업무에 사용한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며 “그의 지시에 따라 컴퓨터 저장장치를 모두 불태웠다”고 말했다. B씨는 수사 상황과 처벌 수위를 설명하면서 변호사를 선임해주고 벌금도 전부 내주겠다고 했다.
 주범인 A씨는 사무실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B씨는 사무실에 가끔 들렀다. 현장을 급습해도 주범들은 잡기 어려운 점조직 형태다. 서로 실명을 감추고 암호명으로 불렀다. 각국에서 메신저와 파일 공유 시스템으로 현장 상황을 실시간 파악한다. 도박 자금은 구글 드라이브를 공유하면서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계좌별로 면밀히 관리한다. 관리 서버를 서울 서초동 법원 인근 회사에 두기도 했다.
 범죄 조직은 실무자들이 잡혀도 외국으로 새로운 가담자를 불러와 범행을 이어간다. 해외에 있는 주범을 잡지 않는 한 보이스피싱이나 사이버 도박 범죄 근절이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문 수사팀 서둘러 만들어야

 ◇“현재 시스템으론 못 잡아”=검거된 사람들 사이에선 “A씨가 마약에도 손을 대는 것으로 안다”는 진술이 나온다. B씨는 온라인 음란물 유통과 연루됐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이 동남아에서 호텔과 마사지숍 운영에도 관여한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한국인 범죄자의 해외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는 얘기다. 문제는 현지 경찰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중국이나 베트남·필리핀 수사당국은 보이스피싱이나 사이버 도박 범죄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며 “한국에 전문 수사 조직을 만들어 지속해서 국제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리핀 경찰 주재관과 인터폴 간부 등을 지낸 박외병 동서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중국이나 동남아에선 공안 당국의 협조 없이는 수사가 불가능하다”며 “인터폴을 통해 수배해도 검거를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해당 지역을 근거로 한 범죄에 우리 국민 피해가 심각한 만큼 네트워크를 강화할 수 있도록 국가별 전담 인력 배치가 필요하다”며 “전문성이 쌓일 만하면 근무처가 바뀌는 경찰 인사 시스템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범죄 수사를 지휘했던 양중진 변호사(전 수원지검 차장)는 “현실적으로 해외에 있는 주범을 잡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라며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려고 해도 정확한 소재지 주소를 통보하는 등 복잡한 절차가 많아 진행이 어렵다”고 설명한다.

중국서 보이스피싱 100명 검거
 현지 공안 당국의 협조만 확보하면 검거는 어렵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이스피싱 수사 경험이 많은 당국자는 “얼마 전에도 중국 공안에서 다른 지역의 요청을 받아 보이스피싱 조직 100여 명을 검거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인 대상 범죄는 국가 간 협력이 미진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범인들이 대담한 행각을 벌이곤 한다. 동남아 지역에서 한국계 마약밀매 조직 보스를 추적했던 한 전직 수사 관계자는 “현지 경찰과 협력해 검거 작전을 벌였으나 정보가 새서 놓쳤다”면서 “직후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살해 협박을 하더라”고 말했다.

"유로폴 같은 동아시아폴 창설해야" 

박상융 변호사

박상융 변호사

온라인 범죄 수사 전문가로 ‘드루킹 사건’의 특검보를 맡았던 박상융 전 경찰청 마약수사과장(사진·변호사)은 23일 “마약과 보이스피싱·사이버도박 피해를 근절하려면 중국과 필리핀·베트남 수사 당국과 협력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 협력을 강화한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해왔다.

“현재 수준으론 어렵다. 중국·일본·베트남·필리핀 등과 합동수사팀을 편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의 유로폴 같은 동아시아폴을 창설해 공조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왜 다른 나라에서 공조 요청에 소극적인가.

“보이스피싱이나 사이버도박은 수익금이 대부분 해당 국가로 들어가는 점도 요인이다. 피해 환수 등 협약 체결이 필요하다.”

-당장 필요한 조치는 없나.

“속아서 해외로 간 초범이나 단순 가담자의 자수를 유도해야 한다. 처벌이 두려워 귀국을 못 하니 계속 범죄에 가담하게 되고 쓰는 돈이 많아지면서 죄가 무거워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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