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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의 역설… 느슨한 전세대출이 ‘갭투자 사기’ 불쏘시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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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전세사기 피해에 따른 전세 기피 현상으로 세입자를 제때 못 구하는 집주인이 늘고 있다. 사진은 23일 서울 강서구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연합뉴스]

전세사기 피해에 따른 전세 기피 현상으로 세입자를 제때 못 구하는 집주인이 늘고 있다. 사진은 23일 서울 강서구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연합뉴스]

서민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한 전세가 역설적으로 사기 온상이 됐다. 특히 효과적인 주거 복지책으로 꼽혔던 전세자금 대출은 이번 전세 사기 사태에서 시장을 왜곡시키며 사기의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부작용을 드러냈다. 전세 사기의 원인 및 정부 정책의 효과 및 해결 방안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전세는 서민에 유용한 제도 아니었나.
“서민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세입자는 전세를 통해 비교적 적은 돈을 쓰고 일정 기간 안정적인 거주가 가능했다. 그래서 월세에서 자가 소유로 가는 중간의 디딤돌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임대인 입장에서도 주택 가격 상승기에 소규모의 돈을 들이고도 자가 소유가 가능했다. 자산 증식의 역할도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런데 왜 사기의 온상이 됐나.
“전세는 ‘갭투자’라는 역풍을 낳았다. 전셋값이 매매 가격에 육박한 경우 세입자를 끼고 집을 사는 형태다. 갭투자는 전세 사기의 한 방식이 됐다. ‘빌라왕’ 사건의 경우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세입자가 내는 전세금만으로 빌라를 매입하는 소위 ‘무자본 갭투자’를 한 뒤 ‘바지 임대인’에게 명의를 넘기고 사라졌다. 집값 하락기에 전세 가격과 매매 가격이 거의 같아지는 ‘깡통주택’이 늘어난 것도 전세 사기 창궐의 한 원인이 됐다. 일부 전세 사기 세력들은 깡통 전세 사실을 숨기고 임차인 보증금을 통해 주택들을 대거 매입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세대출이 사기에 악용됐다는 데.
“사기 세력은 임차인에게 전세 대출 활용을 부추겼다. 임차인 입장에서 전세 대출을 받는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기에 가능했다. 전세 대출은 주택담보대출보다 대체로 1%포인트가량 이자율이 낮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도 적용받지 않는다. DSR은 개인이 한해 갚아야 할 대출 원리금이 연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정부가 가계 대출 총량을 관리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쓰고 있는 도구인데, 전세 대출에는 예외로 둔 것이다. 전세대출은 전세보증금의 최대 90%까지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전세 대출을 금융 상품이 아닌 주거복지 정책으로 여기며 규제보다는 지원했는데, 결과적으로 ‘임차인에 돈을 빌려주지만 임대인의 갭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꼴이 돼 버렸다’(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는데.
“정부는 우선 피해 주택에 대한 경매 유예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향후 특별법을 만들어 현재 거주하는 주택을 낙찰받기 원하는 피해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관련 세금 감면 및 장기 저리 대출 등을 지원한다. 임대로 살기를 원하는 피해자에 대해선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해당 주택을 산 뒤 피해자에게 공공 임대주택으로 제공한다. 다만 이런 제도를 통해 피해자가 원하는 완전한 보증금 회수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정부에서 피해액을 보전해 줄 방법은 없나.
“야당을 중심으로 공공이 일괄적으로 관련 채권을 회수해 피해자에게 우선 보상해주자는 주장이 나온다. 우선 정부가 피해 금액을 갚아주면 이후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화하긴 어려울 거란 전망이 우세하다. 모든 개인 간 빚·거래 등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될 수 있어서다. 정부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액 역시 국가에서 보전해야 한다는 논리여서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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