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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생과 부딪히며 '중꺾마'...여자아이스하키, 사상 첫 2부 승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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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한국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이 23일 광교복합체육센터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4부리그 최종전에서 카자흐스탄을 꺾은 뒤 달려나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한국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이 23일 광교복합체육센터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4부리그 최종전에서 카자흐스탄을 꺾은 뒤 달려나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등록 선수 고작 404명, 학교팀은 전무하고, 실업팀은 단 한 팀. 열악한 저변 속에서도 한국 여자아이스하키가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2부리그로 승격하는 기적을 썼다.

한국은 23일 경기도 수원시 광교복합체육센터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23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여자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B(3부리그) 5차전에서 카자흐스탄을 2-1(1-1, 0-0, 1-0)로 꺾었다.

1피리어드 4분 만에 파워플레이(상대 페널티로 인한 수적 우세 상황)에서 박종아(27)의 절묘한 패스를 문전에 있던 포워드 한수진(35·이상 수원시청)이 마무리했다. 1피리어드에 동점골을 내준 한국은 3피리어드 종료 3분37초를 남기고 김희원(22·수원시청)이 강력한 슈팅을 탑 코너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종료 9초를 남기고 카자흐스탄이 엠티넷 플레이(골리를 빼고 추가 공격수를 투입하는 것)를 펼쳤지만 선수들이 육탄방어로 마지막 슈팅을 막아냈다. 종료 버저가 울리자 벤치에 있는 선수들까지 골리 허은비에게 달려가 빙판에 포개져 감격을 나눴다.

카자흐스탄과 치열한 경기를 펼친 한국 선수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카자흐스탄과 치열한 경기를 펼친 한국 선수들.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앞서 한국은 지난 17일부터 이탈리아(2-1 연장승), 폴란드(4-0승), 슬로베니아(4-2승), 영국(3-2승)을 연파한 데 이어 카자흐스탄까지 잡았다. 한국은 5전 전승(4승1연장승, 승점14)을 기록, 6팀 중 1위에 등극했다. 한국은 대회 우승팀에만 주어지는 디비전1 그룹A 승격권을 따냈다. 캐나다, 미국 등 세계 톱10이 참가하는 톱 디비전(1부) 바로 밑 2부리그다. 한국은 2017년 3부 승격 후 번번이 좌절을 맛본 끝에 내년에 2부 무대를 밟게 됐다.

2018년 평창올림픽 당시 한국 여자아이스하키는 북한과 단일팀을 구성했지만 5전 전패를 당했다. 대중 관심 밖으로 멀어졌고, 대회 후 새러 머리(캐나다) 감독과 선수들이 불화를 겪은 게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골리 신소정은 은퇴 후 고려대 남자팀 골리 코치가 됐고, 캐롤라인 박(박은정)은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가 됐다. 세대 교체 후 하락세가 계속됐다. 작년 3부리그에서 1승4패, 5위로 가까스로 4부리그 강등을 면했다.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김도윤 감독. 박린 기자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김도윤 감독. 박린 기자

평창올림픽 대표팀 코치였던 김도윤 수원시청 감독이 작년 8월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피아니스트 출신 베테랑 포워드 한수진를 5년 만에 대표팀에 재합류 시켰다. 수원시청 선수 14명을 뽑아 조직력을 끌어 올렸다. 평창올림픽 멤버이자 캐나다 토론토에서 간호사로 활동한 대넬 임(한국명 임진경), 미국으로 입양됐던 수비수 박윤정(미국명 마리사 브랜트) 등 해외파 7명을 호출했다.

한국 선수 21명 중 18명이 키가 1m50㎝대, 1m60㎝대로 체격이 작은 편이다. 김 감독은 “우리는 힘도, 기술도 밀린다. 강점인 스피드로 전방압박해 상대 실수를 유발 시키는 전략으로 나섰다. 최근 2개 대회 연속 득점과 파워플레이가 꼴찌였지만, 이번 대회는 둘 다 1위”라고 했다. 한국은 15골을 몰아치고 6실점만 내줬다.

한국에 실업팀이 한 팀 뿐이다 보니 남자 중학교 대회에 번외로 참가했다. 김 감독은 “남자 중학교 팀에 5골 차로 진 적도 있다. 힘이 달리지만 몸으로 부딪혔다. 올 초 일본 도마코마이로 전지훈련을 가서 클럽팀과 스파링도 했다”고 전했다.

이은지는 지난 경기에 스케이트 날에 베여 결장했지만, 한수진은 손목 통증을 참고 뛰고, 미국 코네티컷대 골리 허은비(20)는 무릎에 테이핑을 칭칭 감고 5경기에서 119세이브를 올렸다. 이번대회에서 4골-2도움을 올린 김희원은 “지난 1년간 몸 성한 곳 없이 준비했다. 라커룸 화이트보드에는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란 문구를 적어두고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카자흐스탄 결승골의 주인공 김희원.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카자흐스탄 결승골의 주인공 김희원. 사진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대표팀 주축이 대거 속한 수원시청은 공교롭게도 정치적인 이유로 탄생한 팀이다. 문재인 정권 당시 평창올림픽 단일팀 엔트리 구성 과정에서 몇몇 한국 선수들이 기회를 박탈 당하자, 공정에 민감한 2030 세대가 크게 반발했다. 그러자 정부에서 선수들을 달래기 위해 실업팀 창단을 약속했고, 염태영 당시 수원시장이 그해 12월 팀을 창단했다. 선수들의 연봉은 3000~4000만원 정도지만, 평창올림픽 때처럼 ‘투 잡’을 뛰지는 않아도 됐다. 한 아이스하키인은 “정치적인 이유로 실업팀이 만들어졌지만 연습경기를 할 상대가 없는 기형적인 구조다. 반대로 경기력은 올라왔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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