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돈 한푼 없이 '빌라왕'…'주거 사다리' 전세, 어쩌다 역풍 낳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민들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한 전세가 역설적으로 사기 온상이 됐다. 특히 효과적인 주거 복지책으로 꼽혔던 전세자금 대출은 이번 전세 사기 사태에서 시장을 왜곡시키며 사기의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부작용을 드러냈다. 한국 고유의 ‘사금융’ 성격을 지닌 제도지만 고금리 시기에 취약성을 드러낸 전세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세 사기의 원인 및 정부 정책의 효과 및 해결 방안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전세 사기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주현 금융위원장, 빅 의장,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김성룡 기자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전세 사기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주현 금융위원장, 빅 의장,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김성룡 기자

전세는 서민에 유용한 제도 아니었나
서민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세입자는 전세를 통해 비교적 적은 돈을 쓰고 일정 기간 안정적인 거주가 가능했다. 그래서 월세에서 자가 소유로 가는 중간의 디딤돌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임대인 입장에서도 주택 가격 상승기에 소규모의 돈을 들이고도 자가 소유가 가능했다. 자산 증식의 역할도 했다.
그런데 왜 사기의 온상이 됐나
전세는 ‘갭투자’라는 역풍을 낳았다. 전셋값이 매매 가격에 육박한 경우 세입자를 끼고 집을 사는 형태다. 갭투자는 전세 사기의 한 방식이 됐다. ‘빌라왕’ 사건의 경우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세입자가 내는 전세금만으로 빌라를 매입하는 소위 ‘무자본 갭투자’를 한 뒤 ‘바지 임대인’에게 명의를 넘기고 사라졌다. 집값 하락기에 전세 가격과 매매 가격이 거의 같아지는 ‘깡통주택’이 늘어난 것도 전세 사기 창궐의 한 원인이 됐다. 일부 전세 사기 세력들은 깡통 전세 사실을 숨기고 임차인 보증금을 통해 주택들을 대거 매입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세대출이 사기에 악용됐다는 데
사기 세력들은 임차인에게 전세 대출 활용을 부추겼다. 임차인 입장에서 전세 대출을 받는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기에 가능했다. 전세 대출은 주택담보대출보다 대체로 1%포인트가량 이자율이 낮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도 적용받지 않는다. DSR은 개인이 한해 갚아야 할 대출 원리금이 연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정부가 가계 대출 총량을 관리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쓰고 있는 도구인데, 전세 대출에는 예외로 둔 것이다. 전세대출은 전세보증금의 최대 90%까지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전세 대출을 금융 상품이 아닌 주거복지 정책으로 여기며 규제보다는 지원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임차인에 돈을 빌려주지만 임대인의 갭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꼴이 돼 버렸다’(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 주택 경매 유예, 우선 매수권 부여…급한 불 끄지만

정부는 피해 주택 경매 유예 조치를 통해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놓인 임차인에게 시간을 벌어줄 예정이다. 그동안 정부는 피해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주는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을 제정해 피해자를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당장 급한 불을 끌 순 있지만 실효성의 한계도 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는데
정부는 우선 피해 주택에 대한 경매 유예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향후 특별법을 만들어 현재 거주하는 주택을 낙찰받기 원하는 피해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관련 세금 감면 및 장기 저리 대출 등을 지원한다. 임대로 살기를 원하는 피해자에 대해선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해당 주택을 산 뒤 피해자에게 공공 임대주택으로 제공한다. 다만 이런 제도를 통해 피해자가 원하는 완전한 보증금 회수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정부에서 피해액을 보전해 줄 방법은 없나
야당을 중심으로 공공이 일괄적으로 관련 채권을 회수해 피해자에게 우선 보상해주자는 주장이 나온다. 우선 정부가 피해 금액을 갚아주면 이후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화하긴 어려울 거란 전망이 우세하다. 모든 개인 간 빚·거래 등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될 수 있어서다. 정부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액 역시 국가에서 보전해야 한다는 논리여서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전세 제도를 손봐야 하지 않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세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는 한 방송에서 ‘전세 제도는 정부의 잘못된 개입과 중산층의 갭투자로 만들어진 전 국민 폰지 게임이자 전 국민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당장 전세 제도를 없애는 건 비현실적이지만, 적어도 전세 대출에 대한 제도 개선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동산 급등기에 전세 대출이 전세 수요 증가와 갭투자 확대를 통해 부동산 시장으로의 자금의 쏠림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정부는 신중한 모습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전세의 순기능도 있는 만큼 섣불리 ‘전세는 악’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며 “섣불리 제도에 손을 댈 경우 역효과가 빚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